100세 시대를 준비하기 위한 지침을 통해 멘토 역할을 해 왔다.
강 대표는 2012년 말 부회장으로 일했던 미래에셋에서 떠나 이듬해 초 미래와금융연구포럼을 세웠다.
회사 이름 끝에 포럼을 붙인 이유도 있다.
1인 기업처럼 운용하지만 다양한 인력풀을 확보하고 있어 필요하면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력 광장과 같은 의미로 포럼을 쓴 셈이다.
강 대표는 서울대를 졸업한 이듬해인 1973년 한국거래소 전신인 한국증권거래소에 입사했다. 거래소 연수 일환으로 일본 동경증권거래소를 방문하게 됐고, 이를 계기로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강 대표는 한국외국어대에서 6개월간 직장인을 위한 일본어 전문 강습을 받으면서 학업과 업무를 병행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강 대표는 훗날 일본통 금융전문가로 불릴 수 있었다.
강 대표는 1977년 대우증권 해외조사과로 자리를 옮겼다. 자본시장 상징 격인 거래소를 떠나 증권사로 간 이유에 대해 강 대표는 "현업을 해보기 위해서"라고 명쾌하게 답했다.
강 대표는 대우증권 해외조사과 대리부터 시작해 조사분석과장, 국제부 차장, 동경사무소장, 국제영업부장, 국제ㆍ인수본부 담당이사, 상무, 국제본부장을 차례로 역임했다.
강 대표는 1984년 대우증권에서 국내 증권사 가운데 처음 동경에 해외사무소를 냈을 때에도 파견돼 8년 넘도록 일본에서 머물렀다.
이런 경험은 강 대표가 노후설계 전문가로 성장하는 데에도 밑거름이 됐다.
당시 일본은 급속한 노령화를 우리나라보다 먼저 겪고 있었다.
강 대표는 이를 옆에서 보면서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으로 예견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일본에 머물면서 겪은 충격적인 모습 가운데 하나는 푼돈을 벌기 위해 수많은 노인이 비즈니스호텔에서 밥 당번이나 청소 같은 허드렛일을 하는 것이었다"며 "우리나라도 이런 날이 멀지 않았음을 확신했다"고 말했다.
강 대표는 1998년 당시 국내 3대 투자신탁사 가운데 하나인 현대자산운용 대표를, 2000년에는 굿모닝투자신탁운용 대표를 맡았다.
2004년 들어서는 미래에셋 부회장 겸 투자교육연구소장으로 일하면서 노후설계 전문가로 통하게 됐다.
강 대표는 요즘도 은퇴 이후 삶의 표본을 제시하면서 활발한 방송과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