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정 적수도강, 중국 영도소조의 시발점

2014-03-30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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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이저우성 츠수이의 다리.


아주경제 베이징특파원 조용성 기자 = 1935년3월 대장정을 하던 중국공산당 홍군은 구이저우(貴州)성에서 츠수이(赤水, 적수)를 2차도강한 후 반격과 퇴각을 두고 노선투쟁을 벌였다. 마오쩌둥은 퇴각을 주장했지만 중공 중앙은 다수결을 통해 국민당군에 대한 공격을 결정했다. 마오쩌둥은 그날 밤 등불을 들고 저우언라이(周恩來), 주더(朱德)를 개별적으로 만나 설득작업을 벌였으며, 결국 공격계획은 취소됐고 마오쩌둥의 의지대로 홍군은 지속적으로 퇴각했다. 이로 인해 홍군은 장개석군의 매복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잏이 마오쩌둥은 신속하고 정확한 의사결정을 위해 '3인군사소조'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후 긴급한 일이 닥쳤을때 3인군사소조가 결정을 내렸다. 이는 중공 역사상 최초의 소조였고 영도소조의 시발점이다. 당시의 소조는 지금의 영도소조와 운영방식이 다르지만 '큰 일이 닥쳤을때 소조를 이용한다'는 원칙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후 중국공산당은 1941년 옌안(延安)정풍운동 당시 중공중앙조사연구국을 설치해 1년6개월동안 운영했다. 연구국은 현재 영도소조의 전신으로 평가받는다. 신중국 성립후 공산당은 1954년7월 중앙대만공작영도소조를, 1956년1월에 중앙정법소조를, 1958년3월에 중앙외사소조를 설립했다.

1958년6월 중공중앙은 '재경, 정법, 외사, 과학, 교육소조성립에 대한 통지'를 통해 소조는 당중앙의 정치국과 서기처 직속기구로 정치국과 서기처에 직접 보고한다고 규정했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영도소조 활동은 중단됐으며 중앙문혁영도소조만이 활동했다.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영도소조의 기능들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1988년에는 중앙선전사상공작영도소조가 만들어졌다. 이후 관련 법규들이 제정됐다.

중공중앙에서 영도소조는 기관내부 통지를 통해 설립되다가, 규범적인 문건을 거친후, 이제는 행정법규와 국가법률에 의해 설립되고 있다. 하지만 지방에서는 아직도 영도소조가 비교적 자유롭게 설립되고 있다.

중국의 정치조직은 각 부서별 부처별로 세밀하게 분업화되어 있으며 각 부분의 재량권에 한계가 있는 만큼 거대한 규모의 일에 부딪혔을 때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할 수 있다. 각 부문을 조정해내는 기구가 영도소조인 셈이다.

하지만 영도소조는 대체로 구성원이나 조직기구가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신비로운 조직으로 비춰지고 있다. 공개된 바로는 영도소조는 조장, 부조장, 조원, 판공실로 조직된다. 조장과 부조장은 권력이 비교적 높은 지도자가 맡으며, 조원은 소조업무와 연관된 차하위층의 지도자로 구성된다. 판공실은 소조업무와 가장 밀접한 기구의 인사가 겸임한다. 판공실은 회의나 문건을 통해 조원들의 의견을 조율해 낸다.

최근들어 3개의 영도소조가 생겨났다. 2013년 12월 중앙전면심화개혁영도소조가, 지난 2월에 중앙인터넷안전정보화영도소조가 이달초에 중앙군사위원회 국방군대개혁심화영도소조가 신설됐다. 3곳 영도소조의 조장은 모두 시진핑(習近平) 공산당 총서기가 맡았다. 이를 두고 1인권력집중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기도 하다.

국무원 부총리였던 쩡페이옌(曾培炎)은 "각 부처를 넘나드는 영도소조조직을 통해 중요한 전략임무를 시행하는 방식은 중국공산당이 오랜기간 실천해오면서 형성된 효과적인 통치방법이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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