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오래 살게 되면서 뜻하지 않은 문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저 오래 살기만 바랬지, 오래 살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그 무수한 시간을 어떻게 살고, 무엇으로 채울지에 대한 준비가 안 돼 있는 것이다. 먹을 준비를 안했고, 먹고 나서는 무얼 할지 고민이 부족했던 것이다. 누구에게나 장수의 기회가 왔지만, 기회를 움켜쥐고 제대로 활용할 준비가 안돼 있는 셈이다.
먼저, 먹을 준비를 해야 한다. 즉 길어진 노후생활을 버틸 수 있는 충분한 재정적 뒷받침을 마련해야 것이다. 옛날이라면 혹시 모르겠지만, 혹여 자식에게라도 기댈 생각은 금물이다. 부모를 부양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세대가 바로 요즘 젊은 세대다. 1980년대만 해도 부모를 부양하겠다는 자식들이 70%를 넘었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겨우 30%선을 왔다 갔다 할 뿐이다. 설령 부모를 부양하겠다는 의지가 있더라도 취직과 아이교육 등으로 부양할 능력이 없는 세대가 요즘 젊은 세대다.
먹을 준비를 했으면, 이제는 먹고 나서 무얼 할지 준비해야 한다. 먹고 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얘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은퇴 이후에는 단순히 물질적 풍요를 바탕으로 이를 소비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였다면, 근래 들어서는 나 자신을 어떻게 소비하느냐가 관심사가 되고 있다. 즉, 자아실현이라는 측면에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혹은 누르고 있었던 본연의 자아를 발견하고 이를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60세를 전후로 은퇴하더라도 가장 많은 사람이 사망하는 연령이 90세에 육박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30~40년이 여전히 남게 된다. 먹고 소비하는 것만으로 채우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다.
젊은 시절 자식과 가족 등 타인의 가치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면 이제는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기에 딱 좋은 시기가 우리에게 주어진 셈이다. 준비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가치다. 은퇴와 동시에 자아실현하겠다고 해서 지니(램프의 요정)가 궁궐을 짓듯 하루아침에 뚝딱 이룰 수 있는 것이 자아실현이 아니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뭔지, 내가 원하는 것은 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미리부터 탐색하고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필요하다면 교육도 받아야 한다.
나를 아는데 무슨 교육까지 필요하겠느냐 하겠지만, 젊은 시절 수십 년 동안 자신을 잊고 살았던 사람에게 그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꿈이 뭐냐"는 물음에 "잊은 지 오래다"라는 대답을 무심히 내뱉고, "인생의 우선가치가 뭐냐"는 질문에 우물쭈물 대답을 회피한다. 길어진 인생후반은 온전히 자기 것이 될 수 있도록, 자기가 주인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숨이 붙어 있으니 어찌어찌 살아질 것이다. 하지만 흐르는 강물에 배 띄운 듯 흘러가는 삶이 아니라, 키를 움켜쥐고 나아가는 삶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시간을 버틸 수 있는 물질적 준비와 시간을 채울 수 있는 정신적 준비가 병행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