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희 삼성 회장이 지난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에서 사장단과 주요 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회의에서 신경영을 선언하고 있다.
아주경제 이재호 기자 = 지난 20년간 매출 13배, 수출규모 15배, 이익 49배 증가. 한 중소기업이 어렵게 사업을 시작한 뒤 대기업으로 성장하면서 일궈낸 인생역전 스토리가 아니다.
20년 전이나 현재나 여전히 재계 1위 그룹인 삼성이 거둔 믿기 힘든 성과다. 이미 성숙기에 접어든 기업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길래 이같은 괄목할 만한 도약을 이뤄낼 수 있었을까.
기적은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에서 이건희 삼성 회장 주재로 열린 경영전략 회의부터 시작됐다. 삼성 사장단과 주요 임원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 회의에서 이 회장은 경영 패러다임의 변화를 선언한다.
이 회장은 "삼성은 이제 양 위주의 의식과 체질, 제도, 관행 등에서 벗어나 질 위주로 철저히 변해야 한다"며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른바 신경영 선언이다.
신경영 선언 이후 삼성은 전혀 다른 기업으로 변모했다. 싸구려 가전제품을 만들던 삼류 기업에서 선도 기업을 맹추격 하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를 거쳐 이제 시장을 주도하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 삼류 기업에서 글로벌 리더로
28일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에서 이 회장과 삼성 사장단 및 부사장단, 협력사 대표 등 3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신경영 20주년 기념 만찬 행사가 열렸다. 신경영 선언 이후 삼성의 변화상을 공유하고 새로운 도약의 의지를 다지는 자리였다.
1993년 초 미국 로스엔젤레스를 시작으로 전 세계 판매법인과 생산라인을 돌며 현장 경영에 나선 이 회장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불량률이 10%에 육박하는 삼성 제품은 그 누구도 찾지 않는 애물단지였다.
낮은 품질보다 더 문제가 됐던 것은 임직원들의 무사안일주의였다. 삼성전자 가전제품 조립라인의 직원들이 규격에 맞지 않는 부품을 칼로 깎아낸 뒤 억지로 끼워맞추는 비상식적인 일이 생산현장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 회장은 신경영을 선포한 이후부터 품질은 물론 인력과 경영의 질을 모두 높이는 작업에 착수했다. 불량률을 낮추지 못하면 대규모 적자가 발생해도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생산라인을 멈췄다. 외부 인재와 여성 인력 채용을 늘리며 조직 전체에 만연한 순혈주의와 관료주의를 혁파하는 데도 앞장섰다. 또 직원들의 업무 효율성을 높이고 협력회사의 경쟁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수많은 프로그램을 새로 도입했다.
그 결과 신경영 첫 해 29조원에 불과했던 매출은 지난해 말 380조원으로 13배 늘었다. 이익은 8000억원에서 39조원으로 49배로 급증했으며 수출규모도 107억 달러에서 1572억 달러로 15배 증가했다. 임직원 수는 14만명에서 42만명으로 확대됐으며 시가총액은 7조6000억원에서 338조원으로 44배 급증했다.
글로벌 경기침체와 시장 불확실성 확대 등으로 여전히 위기의식이 강조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날 만찬 행사에 참석한 이들의 표정에서 지울 수 없는 뿌듯함을 읽을 수 있었던 이유다.
지난달 30일 글로벌 브랜드 컨설팅 업체인 인터브랜드가 발표한 삼성의 브랜드 가치는 396억 달러(43조원)로 세계 8위에 올랐다. 지난해보다 한 단계 높아진 순위다.
20년 전 글로벌 시장의 변방을 어슬렁거렸던 삼성은 이제 모든 기업인들이 배우고자 하는 롤 모델이 됐다.
지난주 한국을 방문했던 제프리 이멜트 제너럴일렉트릭(GE) 회장은 한 강연에서 "삼성이 거대한 조직을 민첩하게 운영하고 세계 어디서든 싸워서 이기고자 하는 의지 등은 모델로 삼고 싶은 부분"이라며 "GE 내부적으로도 삼성에 대해 많이 분석하고 있다"고 밝혔다.
GE가 어떤 기업인가. 이 회장이 신경영을 구상하면서 기업 경영의 모범사례로 연구했던 기업이다. 불과 20년 만에 두 기업의 위상이 완전히 뒤바뀐 셈이다.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업적을 이뤘지만 이 회장은 여전히 위기를 강조한다. 이 회장은 지난 4월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신경영을 시작한 지) 20년이 됐다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며 "더 열심히 뛰고 사물을 깊게 보고 멀리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의 새로운 20년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 지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