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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사진=이형석 기자 leehs85@ajunews.com] |
21일까지 634만 7185명(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기준)이 관람하며 흥행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세간의 관심은 웰메이드 대작을 추석선물로 선사한 한재림 감독과 호연을 펼친 배우들에게로 쏠리고 있다. 명배우의 이름값을 톡톡히 한 송강호, <건축학 개론> ‘납득이’의 경쾌함을 십분 살리면서도 그를 넘어서는 진중한 연기를 펼친 조정석, 꽃미남 외모에 더해진 장애의 비운을 애절하게 연기한 이종석, 짧은 출연에도 묵직한 인상을 남긴 김태우와 김혜수, 영화 말미에 가서야 얼굴을 드러내지만 실루엣만으로도 압도적 집중력을 발휘한 김의성에 대한 찬사가 뜨겁다.
특히 영화 시작 1시간 만에 등장하고서도 강렬한 존재감을 유감없이 발산한 수양대군, 그를 연기한 배우 이정재에 대한 관심이 드높다. 만족감이 높았던 만큼 상대적으로 적은 출연 분량에 대한 갈증도 크다. 벌써부터 편집된 수양의 분량을 공개하라는 관객들의 청원이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이정재는 최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가진 아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편집된 컷 중 하나를 공개했다. 귀의 생김에 관한 대사 때문에 <관상> 이후에도 배우 이정재의 귀에 눈길이 갈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이어진 설명이었다. 수양이 관상가 내경(송강호)에게 ‘할머니께서 귀가 잘생겼다고 하셨는데…’라고 흘리며 자신이 왕이 될 상인지를 채근하는 장면에 대해 “사실은 앞뒤로 훨씬 더 길게 찍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영화의 러닝타임을 대폭 줄이는 과정에서 편집됐다”고 아쉬워하면서도 “전달할 바는 충분히 담겼다. 짧게 편집된 장면의 대사를 귀담아 들어주는 관객이 있으니 그것으로 대만족”이라고 말하며 활짝 웃었다.
수양의 첫 등장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출현’이라고 할 만큼 관객의 호흡을 일시에 정지시키며 ‘주목’시킨 명장면이니 말이다. 한재림 감독과 배우 이정재, 스태프가 하나 되어 그 장면에 쏟았을 공력이 여실히 드러난다.
“첫 등장에 대한 고심이 컸죠. 위엄만 있어서도 안 되고, 깡패 같기만 해서도 안 되고. 왕족으로서의 기품과 품위를 지니면서도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이 될 만큼의 단호함과 잔인성도 묻어나야 했어요. 이런 면들을 다 같이 보일 수 있다면 좋은 캐릭터가 되겠다는 기대감에 배우로서 설렜습니다.”
이정재의 수양 이야기는 깊었던 고민만큼 계속됐다.
“내경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세조는 실존인물이에요. 계유정난도 비극적 실제 사건이고요. 조선의 왕이었으니 왕이기 전부터 왕의 상이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동시에 수양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어요. 조카를 밀어내고 왕이 된 파렴치한이기도 하고, 흔들리는 왕권을 지키기 위해 끔찍한 행동을 자진했던 인물이기도 하죠. 의견이 분분하지만 저는 다 맞다고 생각해요. 제가 봤을 때 수양은 상남자예요, 또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죄책감으로 일찌감치 왕위에서 물러나 불교에 심취한 사람이고, 죄의식에 일찍 죽었죠. 세조의 영화라면 이러한 내적갈등에 무게를 두고 표현했을 거예요. 중요한 건 세조의 영화가 아니라는 거죠. <관상> 안에서의 수양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고 딱 그만큼 표현해야 했어요.”
이정재가 생각한 <관상> 속 수양의 역할은 이렇다.
“역모의 상으로 보이는 동시에 왕으로서, 귀족으로서의 품위도 갖춘 이중노출의 연기를 의도적으로 설정했어요. 풀어 얘기하자면,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살생을 서슴지 않는 강력한 결단력과 실행력을 갖췄고 그것은 폭력성으로 보여야 했어요. 내러티브상 내경과 처남 팽헌(조정석)은 아픔을 얻어야 하는데 그걸 주는 악한 인물도 수양이 맡아야 하고요. 또 김종서(백윤식)와 관련해 보면, 수양의 시선으로 보면 김종서는 왕권을 흔드는 나쁜 사람으로 보일 수 있으니 강력한 라이벌과 대척점을 이뤄야 해요. 이런 악역을 도맡으면서도 왕족의 기품을 놓치면 안 됐어요.”
수양에 대한 폭넓은 해석을 바탕으로 깔고, 말머리를 다시 첫 등장으로 돌렸다.
“폭력성과 기품을 동시에 표출시키는 첫 등장이어야 했어요. 주위 인물과 확연히 다르게 보였으면 좋겠다 싶었고요. 저 이상으로 감독님의 고민도 컸어요. 감독이 직접 가죽 소재, 털 소재를 고안했고, 흉터를 만들어 위협적으로 보이도록 했어요. 의상이며 표정이며 감독과 의논을 많이 했고 큰 도움을 받았는데, 가장 큰 공은 감독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례로 개 짖는 소리, 정말 공포감을 조성하는 굉장한 연출 아닌가요. 수양이 등장할 때 흐르는 음악 하나에도 신경을 썼더라고요. 꽤 많은 작곡료를 지출하며 공을 들였다고 들었습니다.”
한재림 감독이 여러 모로 힘을 준 미장센 안에서, 블랙 털가죽 조끼와 피 흘리는 흑돼지의 묘한 조화 속에 야수의 피비린내와 왕족의 도도함을 풍기며 등장한 수양이 소리 내어 말하기 시작하는데, 그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목청을 뚫고 터져 나온 화통한 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공명한다. 배우 이정재에게서 들어본 적 없는 소리다.
“목소리가 강력한 비주얼을 받쳐 주지 못하면 안 된다 싶었어요. 촬영 2시간 전부터 발성연습을 했어요. 일부러 쇳소리를 내려 했고, 웃어도 거슬리는 웃음소리를 내려했어요. (평소와) 다르게 들렸다니 기분 좋네요.”
<관상>에서 김종서는 호랑이상에, 수양은 이리상에 비유된다. 특별한 준비가 있었을까.
“느낌을 알아야 연기를 하잖아요. ‘내셔널지오그래픽’이나 ‘동물의 왕국’ 방송 중에 늑대가 나오는 편들을 찾아봤어요. 그 밖의 여러 자료화면도 찾아봤고요. 이리처럼만 하면 수양이 표현되는 건 아니지만, 분명 수양의 일부분으로 시나리오에 적혀 있으니까 제게서 이리 느낌이 나길 바랐고, 특히나 호랑이를 이길 만한 이리 느낌이 나도록 노력했습니다.”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관상>, 주연 이정재가 보는 영화의 재미는 무엇일까.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재미있었어요.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짜임새 있는 오락영화로 완성돼 기분 좋습니다. 한바탕 오락영화를 후련히 보고 나면 바쁜 일상에 쉬어가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잖아요. <관상>은 거기에 더해,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인생행로의 어디쯤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잠시잠깐의 시간을 드리지 않나 싶어요. 운명을 바꾸려 발버둥치는 영화 속 인물들을 보며 내 운명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의 작은 말과 행동이 나와 내 주변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에 대한 생각이 영화관을 나서며 머릿속을 스친다면 소중한 티켓 값은 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