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이(馬凱). |
아주경제 조윤선 기자=중국에 시진핑(習近平) 총서기를 필두로 하는 5세대 지도부가 전면에 나서면서 경제를 이끌 인물들도 대폭 교체를 앞두고 있다. 리커창(李克强) 총리, 장가오리(張高麗) 상무부총리와 함께 시진핑 10년 중국 경제를 이끌어갈 중심에 마카이(馬凱) 현 국무원 비서장이 서있다.
지난해 12월 5일 중국에 거주중인 외국인 전문가를 초청해 중국 신지도부의 시정 방침을 밝힌 자리에 마카이 국무원 비서장은 시진핑 총서기의 바로 오른편에 배석했다. 좌측에는 자오러지(趙樂際) 당 조직부장이 앉았다. 이날 좌담회는 시진핑이 총서기에 오른 후 처음 외빈을 만나는 자리였다. 그의 달라진 위상과 향후 정치적 중량감을 반영하는 모습이었다.
마카이 국무원 비서장은 중국 경제의 실무를 주무를 금융 대외무역 담당 부총리로의 승진이 유력한 상황이다. 홍콩과 미국의 중화권 매체들은 그가 왕치산(王岐山) 신임 중앙기율검사위 서기가 직전에 맡았던 부총리로의 영전을 점치고 있다. 그의 인선은 장관급 인선이 마무리되는 오는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확정된다.
마카이는 1946년생으로 올해 67세이다. 그는 화려한 커리어와 경제운용능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령이며 건강이 안좋다는 소문이 돌아 정치국위원 승진이 무산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하지만 보란 듯이 예상을 깨고 25인 정치국 위원에 올랐다. 정치국위원으로서 그의 전문분야인 거시경제 조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목소리를 낼 것으로 보인다.
실제 그는 국가물가국, 국가경제체제개혁위원회, 국가계획위원회, 국무원 판공청, 국가발전개혁위원회 등 거시경제를 담당하는 국무원 핵심 부처에서 잔뼈가 굵었다. 지방 행정경험이나 실물경제에서의 경험은 없지만 물가나 예산, 경제계획 등의 분야에서는 중국에서 최고의 커리어를 자랑한다. 마카이는 국무원 비서장이 되기 직전인 2003년부터 2008년까지 거시경제를 총괄하는 초대 국가발전개혁위원회(발개위) 주임을 역임한 바 있다.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에 의해 발탁된 그는 1998년 국무원 판공청 부비서장을 맡았다. 그의 주 업무 중의 하나는 당시 부총리였던 원자바오(溫家寶) 를 보좌하는 것이었다. 국무원 판공청에서 근무할 당시, 마카이는 총리급 지도자를 수행해 전국 각지를 시찰하며 조사하고 연구했다. 정부가 운용한 경제의 일련의 조치에 참여해 국가 발전과 개혁 과정을 잘 익혔다.
2003년 봄까지 계획위원회 계통과 체제 개혁부문에서 장기간 활동한 마카이는 같은 해 출범한 원자바오 내각이 과거 국가계획위원회를 확대해 발개위로 개편하자 그 초대 주임 자리에 올랐다.
발개위는 중국 국무원 27개 부서 중 외교부와 국방부에 이은 서열 3위의 부서로, 경제와 사회발전 정책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통해 경제체제 개혁 등 거시조정을 지도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또 철도 사업 등 중국의 대규모 개발사업에 대한 종합심사 및 허가업무를 맡고 있다.
발개위 주임을 맡은 5년간 그는 주로 원자바오와 협력해 거시조정의 추진과 중요 계획의 제정을 담당했다. 환율, 화폐, 무역, 물가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발개위 수장인 그는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가입에 맞춰 중국 경제를 국제적 수준으로 개혁해 나갔다. 또 은행을 포함한 금융개혁과 국유기업 개혁, 실업자 및 퇴직자에 대한 사회보장제도 확립 등 광범위한 개혁방향을 설정했다.
하지만 발개위 주임으로서 지방 법규를 위반한 여러건의 개발정책에 제동을 걸었던 마카이는 2007년 17차 당대회에서 쓴맛을 본다. 당시 가장 유력한 정치국위원 후보였던 그가 지방 표심을 잃어 승진대상에서 제외된 것. 홍콩 명보(明報) 등 중화권 매체는 대규모 사업에 대한 승인권과 감독권을 거머쥐고 있었던 마카이가 지방의 불만 세력을 많이 키운 것 같다고 분석했다.
마카이는 대신 국무위원 겸 국무원 비서장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국가행정학원 원장을 겸했다. 이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거부감을 희석시키는 데 주력한 그는 마침내 지난해 정치국 위원에 올랐다.
마카이는 1946년 6월 산시(山西)성에서 출생했으며 본관은 상하이 진산(金山)이다. 마카이의 부모는 그가 일본의 패망으로 끝난 항일전쟁 이후에 태어나 ‘개선(凱旋)장군’의 뜻을 담은 ‘개’를 따 이름을 지었다 한다.
그는 중국 런민(人民)대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한 경제학 석사로 학업 성적 또한 매우 우수했다. 마카이의 석사 논문 ‘계획가격 형성의 요소 분석(計劃價格形成的因素分析)’은 ‘중국사회과학’잡지 영문판에 실리기도 했다.
한편 마카이는 1973~1979년 베이징 시청구(西城區) 당 간부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중 지금의 아내인 위안중수(袁忠秀)를 만난것으로 전해졌다.
주요 이력 ▲1986~1988 베이징시 물가국 국장 ▲1988~1993 국가물가국 국장 ▲1993~1995 국가경제체제개혁위원회 부주임 ▲1995~1998 국가계획위원회 부주임 ▲2000~2003 국무원 부비서장 ▲2003~2008 국가발전개혁위원회 주임 ▲2012~ 중앙정치국 위원, 국무원 비서장, 국가행정학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