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베이(河北)성 러팅(樂亭)현이 조적인 그는 지린(吉林)성 지린시에서 태어나 장시(江西)성에서 자랐다. 문혁이 종료된 후 1978년 우수한 성적으로 시베이(西北)공업대학 항공기설계학과에 합격했다. 이 곳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그는 항공항천(航天,우주비행)공업부에 입사해 로켓 연구・제작에 참여했다.
항공항천공업부의 전신은 1956년 설립된 중국 국방부 제5연구원으로 이후 제7기계공업부, 항천공업부, 항공항천공업부와 중국항천공업총회사로 명칭이 바뀐다. 그리고 1999년 7월1일 현재의 이름인 항천과기집단으로 재탄생한다.
항천과기집단은 유인우주선 ‘선저우(神舟)’와 탄도미사일인 ‘창정(長征)’, 항공모함 격침 미사일인 ‘둥펑(東風)’을 만들어낸 중국 군수산업의 핵심기업이다. 그는 이 곳에서 20여년을 근무하며 초고속 승진가도를 달렸다.
그가 갓 입사했던 1988년 미국의 휴즈사는 아시아1호위성을 중국의 창정(長征) 3호 로켓을 이용해 발사하려고 했다. 미국으로서는 비용절감을 위한 실험이었으며 중국으로서는 도전이었다. 휴즈사는 위성이 선회를 시작한 후에 로켓이 분리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중국측은 까다로운 조건에 난감해 했다. 협상장에 우연히 참석해 있었던 장칭웨이는 뒷줄에서 “제가 실현해 낼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항공항천공업부는 그에게 중책을 맡겼다. 장칭웨이는 뛰어난 컴퓨터지원설계(CAD)능력에 의거해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시뮬레이션을 구축했다. 이를 통해 휴즈사의 아시아1호 위성발사에 있어서 로켓과 위성의 분리 분야에서 어려운 장애물을 해결했다.
그리고 아시아1호위성은 1990년 4월 발사에 성공했다. 그는 파격적으로 고급공정사(高級工程師)로 승진했으며 3개월 후, 중국 최초의 대추진(大推進) 결박식 탑재 로켓의 발사에 성공했다. 1991년 30세에 그는 유인 우주선 탑재 로켓의 부총설계사에 임명됐고 그는 창정로켓 발사에 성공한다.
눈부신 성과에 힘입어 그는 2001년 중국항천과학기술집단의 총경리에 올라선다. 40세의 나이에 중국 최대 우주비행그룹의 1인자에 오른 것이다.
이후 그는 2002년 유인우주선공정의 부총지휘가 됐다. 총지휘는 4성장군인 총장비부장이 맡는다. 그는 선저우(神舟) 5호, 선저우 6호의 지휘업무를 담당하면서 국민적인 스타로 부상했다. ‘CCTV 올해의 중국경제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중화민족 천년의 꿈을 실현한 주역’으로 칭해지기도 했다.
2007년 8월말, 전국인민대표대회는 46세의 장칭웨이(張慶偉)를 국방과학공업위원회 주임으로 임명했다. 전 국방과학공업위원회 주임인 장윈촨(張雲川)은 허베이 서기로 이동했다. 국방과학기술위원회는 주로 국방과학공업의 계획과 정책, 그리고 표준의 조직・관리, 법규의 제정, 집행상황의 감독을 책임진다.
이듬해인 2008년 5월 중국상용항공기가 상하이에서 출범했다. 국무원 산하 국유자산관리공사가 32%, 상하이시정부가 26%를 투자했으며 모두 190억위안의 자본금으로 성립했다. 직원은 6000명선이다. 국방과학공업위원회 주임이었던 장칭웨이가 회장을 국방과학위원회 부주임이던 진좡룽(金壯龍)이 출범당시 총경리를 맡았었다.
중국상용비행기유한책임공사는 이륙중량 100t, 승객 150명 이상의 대형항공기를 2020년까지 세계시장에 출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현재 세계 대형항공기 시장은 미국의 보잉사와 유럽의 에어버스사가 양분하고 있다. 중국 자주기술로 이 시장을 뚫어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