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시대 핵심100인] <83>완강 – 전기차 국가비전 세운 비공산당 부장

2011-11-0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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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조용성 특파원) 2007년 4월 중국에서 50년만에 처음 비공산당원 출신 부장이 탄생했다. 쉬관화(徐冠華) 부장의 후임으로 과학기술부장에 임명된 완강(萬鋼) 당시 상하이(上海)퉁지(同濟)대 총장이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그해 완강에 이어 역시 비공산당원인 천주(陳竺)가 위생부장에 올랐다.

완강 부장은 중국의 민주당파 가운데 하나인 중국치공당(致公黨) 부주석이다. 중화민국 시대인 지난 1925년 창당한 중국치공당은 현재 당원 수가 1만5600여 명에 이르며 당원은 주로 귀국 화교와 해외 화교의 친인척, 해외에 관계가 있는 저명인사 및 학자 등으로 이뤄졌다.

현재 중국에는 중국치공당 외에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 중국민주동맹, 중국민주건국회, 중국민주촉진회, 중국농민공민주당, 구삼학사(九三學社), 대만민주자치동맹 등 8개의 민주당파가 있으나 사실상 모두 중국공산당의 관리하에 놓여 있다.

완강이 과학기술부 장관에 임명된 것을 두고 당시 상하이 푸동(浦東)간부학원 과학연구부 실험센터 부주임인 왕스촨(王石泉)은 “중죽 공산당은 비공산당원인 완강에 대해 수년간에 걸쳐 인사검증을 했다”며 “완강을 발탁한 것은 중국 공산당이 기술자립과 산업고도화를 절박하게 생각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이어 그는 “완강은 중국과학기술을 몇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1952년8월 상하이(上海)에서 태어난 완강은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69년 지린(吉林)성 옌지(延吉)현으로 하방됐다. 6년간 노동자로 일한 그는 1975년 동북임업대학에 입학했고 졸업후 그 곳에서 강사로 일한다. 이후 1979년 고향인 상하이로 돌아와 퉁지대학에서 열역학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1981년 학위취득후 4년동안 열역학 강사로 근무한다. 학업에 심취한 그는 최고의 공학수준을 자랑하는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1985년 독일 클라우스탈 공과대학 박사과정에 입학한 그는 6년의 학업끝에 기계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91년 아우디자동차 기술개발부 엔지니어로 입사한다. 그는 그곳에서 10년을 일한다.

독일에서 윤택한 생활을 누리던 완강을 귀국하게 하는 사건은 1999년 발생한다. 당시 퉁지대학 자동차학원 원장인 위줘핑(余卓平)은 국무원 교육부 부부장의 부탁을 받고 완강에게 일시 귀국해 중국 자동차 산업의 미래에 대한 컨설팅을 해줄것을 당부했다. 완강은 독일의 자동차공학박사 몇명을 이끌고 중국에 돌아와 고국의 자동차산업을 둘러본다. 당시 중국정부는 자동차산업의 발전방향을 놓고 고심하고 있던 터였다. 완강의 눈에 비친 중국의 자동차산업은 낙후하기 그지없었다. 자국기술은 거의 없었으며 거의 모든 기술을 외국자동차업체들에 의지하고 있었다.

완강은 당시 유럽에서 터져나온 에너지위기에 착안해 신에너지자동차가 전세계 자동차산업의 발전추세라고 믿고 있었다. 이에 따라 그는 2000년 국무원에 청정에너지자동차를 개발해야만 중국자동차산업이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건의했다.

그는 “전통적인 자동차영역에서 글로벌 기업들의 기술은 이미 높은 수준에 달해 있기 때문에 만약 만약 중국이 밑바닥에서부터 내연기관자동차를 연구한다면 지식재산권 문제에 맞닥뜨릴 것”이라면서 “오로지 새로운 영역에 대한 연구개발만이 이 같은 문제를 피할 수 있을 것이며 그 해답은 신에너지자동차에 있다”고 말했다.

국무원은 완강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당시 과학기술부 부장인 주리란(朱麗蘭)은 완강에게 귀국할 것을 요구했다. 주리란의 후임 과기부장인 쉬관화(徐冠華) 역시 그에게 귀국을 요청했다.

2000년 12월24일 완강은 10년동안 일했던 독일 아우디에서 나와 귀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그는 퉁지대학에서 에너지자동차공정센터 주임을 맡는다. 그리고 2년후 퉁지대 부총장에 올랐고 2004년에는 퉁지대 총장에 취임했다. 그는 부총장, 총장직에 머무르면서도 자동차기술개발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수년동안의 개발과정을 거친 통지대학은 상하이자동차그룹과 계약을 맺고 신에너지자동차 프로그램을 공동으로 연구하고 있다. 대학총장시절 그는 “전기차에 대해서 우리는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10년 늦게 연구에 뛰어들었지만, 지금 전기차에 대해 말하자면 중국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고 자신있게 말하기도 했다.

그는 2007년 과학기술부 부장에 취임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이었고 언론은 그를 집중조명했다. 비공산당원이며 16년여 독일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그는 개방적이면서 자유롭고 창의적인 행보를 펼쳐나갔다.

그는 2008 베이징 올림픽 기간에 환경보호를 위해 전동 자동차 등 500대의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카를 각 경기장에서 운행시켰다. 2010년 상하이엑스포장에 전기버스를 등장시킨 것도 완강의 작품이다.

그리고 그는 2010년 “2020년 중국 전기자동차 연간 생산량이 100만대에 달할 것”이라면서 ““2010년까지 신에너지차 산업 발전에 투입된 자금만도 무려 85억 위안에 달한다”고 소개해 글로벌 자동차기업들을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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