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장유샤 사령관을 접견했던 북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앞으로 조선은 중국과 우호협력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겠다”고 화답했다. 쟝유샤 사령관은 방북기간중 김영춘 북한 인민무력부장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장 사령관의 방북이후 양국간 군사교류는 급물살을 탄다. 그해 10월 북한의 변인선 인민무력부 부부장이 중국을 방문해 량광례(梁光烈) 국방부장을 면담했고, 같은달 궈보슝(郭伯雄)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이 북한을 방문해 “북중관계는 피로 맺어졌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다음달인 11월 연평도 포격사건이 일어난다.
선양군구는 동북3성을 커버하는 대군구다. 이 곳은 한반도, 러시아, 몽고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전투력면에서 베이징군구에 이은 두번째를 자랑하고 있다. 특히 북한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만약 한반도에 돌발사건이 발생한다면 가장 먼저 움직일 중국의 부대가 바로 선양군구다. 때문에 북한과 선양군구는 특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한미 연합훈련에 대응해 선양군구쪽에서 가장 먼저 북한을 방문해 북중 군사교류를 강조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장유샤 사령관은 차기 총참모장에 오를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다. 이 밖에도 국방부장이나 총장비부장, 총후근부장 등도 가능성도 있다. 그의 아버지 장쭝쉰(張宗遜)은 1908년생으로 1924년 중국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했고 1927년 중앙군사정치학교 우한(武漢)분교 정치과에 편입했다. 1927년 마오쩌둥(毛澤東)을 따라 징강(井剛)산에서부터 국민당에 대항했다. 1955년 상장에 진급했고 1973년 총후근부 부장을 끝으로 퇴임했다.
장유샤는 1950년 7월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1968년 인민해방군에 입대해 중국인민해방군 14군 40사단 118병단 부연대장, 119단 연대장, 중국인민해방군 14군 40사단 사단장, 육군 13군단 부군장, 2000년 제13군 집단군 군단장을 역임했고 2005년에는 베이징군구 부사령관에 올랐으며 2007년에는 선양군구 사령원에 올랐다. 1997년에 소장에 진급했고 2007년 중장에 올랐다. 그리고 2011년 7월 쑨젠궈(孫建國) 허우수썬(侯樹森) 부총참모장, 자팅안(賈廷安) 총정치부 부주임, 류샤오장(劉曉江) 해군 정치위원리창차이(李長才) 란저우군구 정치위원 등과 함께 상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중국 베트남전 참전 군인 출신이다. 1976년 윈난(雲南)성 제14집단군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하던 그는 역시 중대장 신분으로 1978년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최일선 주력부대를 지휘했고,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중국은 베트남에 본때를 보여준 승리라고 선전했지만 사실상 패배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많은 수의 보병과 대규모 물량의 전차, 그리고 포병을 투입했음에도 운용기술은 40~50년대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고 전투 현장의 통제조차도 원활하지 못했다는 것. 1984년 장유샤는 119연대장으로 올라섰고 그해 벌어진 라오산(老山)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라오산은 중국과 베트남의 변경에 있는 산으로 전략적인 요충지다. 중국군 40사단 전체가 나서서 작전에 참여했으며 이중 119연대가 주공이었다. 장유샤를 위주로 작전계획은 짜여졌고 이 계획은 문화대혁명 이후 가장 완벽성을 기한 보병포병 협동작전이었다. 보병이 적진 200m앞까지 진격하면 포병은 보병이 통신으로 일러준 지점을 정확하게 타격했다. 손쉽게 라오산을 탈취한 장유샤의 부대는 방어작전에서 더 큰 공을 세운다. 당시 베트남군은 두개의 사단으로 라오산을 탈환하려 했다. 수성전에서 장유샤는 베트남군 300여명을 사살하는 공을 거둔다. 부대원은 불과 9명이 사망했다. 장유샤와 함께 라오산에서 작전을 펼쳤던 당시 31사단 사단장 랴오시룽(廖錫龍)은 현 총후근부 부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