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친성은 “각국은 모두 안정을 바탕으로 공통의 이익을 확대시켜야 하며 평화스러운 방법으로 분쟁을 해결해야 한다”고 힘을 주어 말했다. 그는 특히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뜻의 공자에 나오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을 소개하기도 했다. 장친성은 또 “안정된 환경은 중국발전의 전제조건일 뿐 아니라 아시아 번영의 전제조건”이라며 “상호신뢰와 교류를 통해 소통을 지속해야 하며 특히 각국의 핵심이익을 존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인민해방군 내에서 강경파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대학교수처럼 온화한 풍모를 지니고 있으며, 대화에 사용하는 단어 역시 고급스럽고 부드러운 말을 채택하지만 그 안에는 강경한 입장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대만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강한 발언을 쏟아내곤 했다.
그가 2002년 인민해방군 국방대학 교육장이던 시절 대만매체의 인터뷰를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대만의 기자들에게 무척 겸손하고 공손한 태도로 인사를 나눴고 두손으로 깍듯하게 명함을 교환했다. 친절하게 질문에 응대하던 그는 중국의 대만정책에 대한 질문을 맞닥뜨리자 “인민해방군은 반드시 강한 군사력을 확보해야 하며, 대만을 하나의 중국이라는 플랫폼안에 단단히 묶어두어야 한다”며 상당히 강한 표현으로 대답했다. 강한 표현이었지만 그의 표정과 자세는 온화함을 잃지 않았었다.
2005년 중국이 처음으로 실시했던 ‘평화의 사명(和平使命)’ 훈련에서도 그는 대만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보였었다. 중국과 러시아가 합동으로 매년 벌이고 있는 이 훈련은 장친성 부참모장이 기획한 것이다. 당시 ‘평화의 사명 2005’ 훈련은 제1단계 해상 봉쇄, 2단계 상륙훈련, 3단계 강제격리의 3단계로 실시됐다. 당시 총참모장 조리였던 장친성은 “무기사용 수준은 무척 높았고 현장의 국방부장도 높은 평가를 내렸고 각 고급 장성들은 격려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고 말했다. 실제 이 훈련으로 인해 장친성의 작전능력은 인민해방군 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후 대만언론에서 대만삼군대학 교관의 발언을 인용해 이 훈련을 “낙하훈련은 고도가 과도하게 높았고, 잠수함은 밀집해 있어서 위협적인 훈련은 아니었다”고 평가하자 장친성은 “대만의 군관은 연합훈련을 평가할 자격이 없다”라며 “그는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전혀 상황을 모르며, 이 같은 평가는 무책임하고도 완벽하게 잘못된 것”이라고 발끈했다.
장친성 부참모장은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의 신임이 두텁다. 차기 국방부장을 맡아 중앙군사위 위원 자리에 오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홍콩과 마카오의 군사 전문가들은 장 부총참모장이 총참모장이나 국방부장을 맡을 적임자로 꼽고 있다. 마카오에 활동하는 군사전문가인 앤서니 웡은 장 부총참모장에 대해 “중국의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해 확고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는 매우 유능한 인물”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1948년 5월 산시(山西)성 샤오이(孝義)에서 태어난 장친성은 인민해방군 장갑병학원을 나와 군에 입문했다. 이후 난징(南京)육군지휘학원과 국방대학에서 학습했다. 1998년부터는 인민해방군 국방대학에서 부교육장으로 근무했다. 4년후에는 교육장에 올랐다. 그는 5년동안 국방대학에 있으면서 육군 작전계통의 전문가로 이름을 날렸다. 이어 그는 2003년 인민해방군 총참모부 작전부장으로 등용됐고 2004년에는 총참모장 조리(助理)로 활동하다가 2006년에 인민해방군의 대외관계를 총괄하는 부총참모장에 올랐다. 같은해 중장으로 진급했다. 2007년 부총참모장 자리를 마샤오톈(馬曉天)에게 넘겨주고 광저우(廣州)군구 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2009년 다시 인민해방군 총참모부로 돌아와 제1부참모장에 올랐다. 2010년에는 상장으로 진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