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날고 싶은 마음, Longing to Fly, 230x17cm, 1987 |
(아주경제 박현주 기자) 1987년 작품 '날고싶은 마음'은 푸른색의 색실이 가닥가닥 띠로 짜서 구성한 성긴 틈새 사이로 작가의 욕망이 드러난다.
가사와 육아의 규제로부터 탈피하려는 여성작가의 고뇌가 담겼다. 단순하게 평면을 벽에 붙인 것이 아니다. 입체성이 강하다. 벽면에서 15cm 간격을 두고 천장에서 밑바닥에 닿도록 내려덮어 작품 조명에 투영된 그림자는 전시장 흰 벽에 또하나의 공간을 만들고 있다. 작품 제목처럼 '날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작가는 서울대 조각과에서 공부했다. 국내 조각 거장 김종영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957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젊은 여인’으로 특선을 차지할 정도로 장래를 촉망받았다. 하지만 결혼 이후에는 조각 작업을 계속하지 못했다. 작업을 하고픈 열정과 욕망은 포기할수 없었다. 1960년 외국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섬유예술 분야의 대가인 미국 필라델피아 뮤지엄 미술대학의 잭 라르센 교수를 만나면서 예술가로서 제2의 인생을 맞았다.
조각과 출신의 섬유예술가. 그래서일까, 작품은 평면인데도 조각같다. 단순히 씨실과 날실을 일정한 규격으로 교차시켜 무늬를 짜 넣는 직조 작품과는 달리 조각의 분위기를 풍긴다. 조각가의 꿈에서 섬유미술가로 방향을 바꾼 그는 '조각적 타피스트리'를 개척한 그는 '타피스트리의 거장' 정정희(81)씨다.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선보이고 있는 타피스트리 정정희씨의 개인전은 실로 그린 그림', 직조된 조각이 구성하는 부드러운 그림자의 아름다움까지 선사한다.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기까지 묵묵히 작업을 해온 작가의 연륜까지 느껴볼 수 있는 전시다.
![]() |
타피스트리 거장 정정희씨. |
작가는 대학 스승인 김종영선생의 말씀을 이제껏 새기고 작업했다고 했다. “어디에 걸릴 것인지, 팔릴 것인지 말 것인지, 누가 뭐라고 할 것인지 생각지 말라고 당부하셨지요. 그런데 결국 스승님이 이렇게 개인전을 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시는 것을 보니 인연이란 참 묘한 것이지요."
타피스트리는 ‘실로 짜여진 회화’를 일컫는 말로 씨실과 날실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색실로 회화를 한올 한올 짜아나간 고도의 감각과 기술이 어우러진 섬유예술작품이다.
작가는 "직조작품의 매력은 화면의 평면성과 프레임(frame)에서의 해방"이라고 했다. 서로 질감이 다른 평면과 양감과의 대비와 조화, 적절한 공간의 삽입, 이것은 전통적인 타피스트리의 규범에서의 탈피였다.
"내가 흥미를 가지고 되풀이하고 있는 작업은 섬유가 갖고 있는 자연스러운 주름이나 늘어지는 곡선 등의 가변성을 작품에 도입하는 일이다. 여러 개의 띠를 짜고 규칙적인 간격으로 꾸미고 펴보면 리드미컬한 공간과 곡선이 생기고, 벽에 걸었을 때 생기는 음영까지도 작품과 일체가 되는 시각미를 형성한다."
정정희씨는 "이런 작업은 매일 매일 색종이를 가위질하고 펴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했다.
타피스트리는 섬유공예품이 발달함에 따라 점차 생활용품에서 예술품으로서 그 존재 가치가 바뀌게 되었다. 유럽이나 미국의 경우 타피스트리 작품도 유행의 흐름을 타고 1950년∼70년 에는 새로운 소재를 이용한 독특한 타피스트리가 많이 전시되었으며, 장식용으로서가 아닌 순수 조형물로서 개척되고 발전됐다.
70년대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행의 조류는 다시 유럽의 전통 타피스트리 기법을 응용, 회화적 표현을 강조한 작품 쪽으로 흐르는 경향을 보인다.
타피스트리 작품들은 기존 페인팅에서 느낄 수 없는 독특한 질감을 갖고 있으며 따뜻하고 부드럽다. 또한 시각적으로나 촉각적 측면에서 다른 장르보다 친숙하다.
![]() |
흑백의 구성 |
현재 유럽이나 미국, 일본 등에 타피스트리는 호텔이나 대형 건물의 로비 등에 폭넓게 보급되어 많은 사람들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어 인테리어 감각을 반영해 주는 중요한 영역으로 자리잡고 있다.
조은정 미술평론가는 "타피스트리가 여전히 공예로 인식되는 것은 이 분야 예술가들의 배경이 디자인 혹은 자수에서 출발했기 때문이었다"며 "하지만 정정희는 조각가로서의 자의식이 타피스트리를 문양을 놓은 직물이 아닌 하나의 독립된 구조로 구축해내는 발판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때문에 한국 현대미술에서,타피스트리의 정정희의 존재가 한국의 섬유미술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예술성이 자원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작가 정정희씨는 그동안 대한민국공예대전 심사위원,동아미술제 심사위원,한울회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한국섬유미술가회 고문, 한울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품은 서울시립미술관,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오묘한 색의 배합과 부드러운 그림자까지 아우르는 시각적 완성도가 돋보이는 정정희의 '실로 만든 예술'을 만나볼 수 있는 전시는 20일까지 열린다. (02)3217-64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