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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조용성 특파원) 중국 국무원 위생부 서기 겸 상무부부장인 장마오(張茅)는 중국의 의료개혁과 질병문제 등을 담당하고 있다. 위생부 부장인 천주(陣竺)와 함께 위생부를 이끌고 있다. 보통 한 부의 부장이 해당 부의 당 서기를 맡지만 천주 위생부장이 공산당원이 아닌 관계로 당 서기를 장마오 부부장이 맡고 있다.
장마오 서기의 장인은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의 정치스승으로 유명한 구무(谷牧)다. 구무는 산둥(山東)성 롱청(榮成) 출신으로 문화대혁명 기간에 하방되지 않고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덩샤오핑(鄧小平)을 도와 경제를 관리했다. 1975년에 국무원 부총리에 올랐고 1980년 중앙서기처 서기를 거쳐 1982년에 국무위
개혁개방초기에 구무는 국무원 수출입관리위원회, 국가외국투자관리위원회 주임을 겸임하고 있었고, 당시 제1기계공업부 외사국 국장이던 장쩌민을 자주 데리고 지방시찰을 다녔다. 이후 장쩌민이 공업부 부장에 올라서도록 이끌어준다. 장쩌민은 공산당 총서기로 중난하이(中南海)에 들어간 이후에도 구무를 상당히 존경했다고 전해진다. 구무에게는 4남1녀가 있으며, 구무의 정치력을 이어받은 사람은 아들들이 아닌 사위였다.
장마오 역시 고위관료의 아들이다. 국무원 농촌발전연구센터 고문인 장톄푸(張鐵夫)가 그의 아버지다. 2006년 장톄푸가 사망했을 때 신화사는 “후진타오(胡錦濤), 원자바오(溫家寶), 쩡칭훙(曾慶紅), 후이량위(回良玉), 허궈창(賀國强), 왕강(王剛), 완리(萬里)와 구무 등이 애도를 표했다”고 전했다. 이는 장마오에게 일정부분 당내 영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장마오는 1954년2월 베이징에서 출생했으며 명문가 자제들이 주로 다니던 베이징8중학교를 나왔다. 문화대혁명 기간에도 그의 아버지는 낙마하지 않았고, 1969년 베이징의 유리가공공장의 노동자로 사회의 첫발을 내딛었다. 대입이 부활한 후 1978년 베이징사범대학 역사학과에 진학했고 중국인민대학 공산당역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는 관료생활중에 베이징대학 경제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민대학 석사를 받은 후 장마오는 베이징유리가공공장으로 돌아가 부공장장에 올랐으며 1990년 베이징시 대외경제무역위원회 부주임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베이징 하이뎬(海淀)구 상무 부구장, 구장, 베이징 시장 조리, 베이징시 신기술산업개발시험구 관리위원회 주임 등의 이력을 밟았다. 그리고 1998년 44세의 장마오는 베이징시 부시장으로 승진하며 정치스타로 떠올랐다. 이와 함께 29회 올림픽 조직위원회 집행부주석에 올라 차세대 정치인으로의 성장성을 보여줬다.
그가 부시장이던 2003년 베이징에 사스가 창궐했다. 당시 위생부장이던 장원캉(張文康)은 “사스사망자는 3명에 불과하며 베이징에서의 생활이 안전하다”며 사건은폐에만 급급해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장마오도 베이징시 부시장으로서 책임이 있었지만 문책은 빗겨갔다. 당시 사스사태로 멍쉐눙(孟學農) 베이징시장과 장원캉 위생부장이 해임됐다.
8년동안 베이징부시장을 역임한 후 장마오는 2006년 국가발전개혁위원회 부주임으로 이동했다. 직급상으로는 수평이동이었지만 발개위가 움켜쥔 권력을 따져볼 때 영전이었다. 그는 처음에 사회발전국, 교통국, 취업분배국을 관리했다. 같은해 발개위와 위생부가 주도하는 의료체제개혁협조영도소조가 탄생했다. 사스를 경험해봤으며 사회발전국을 맡고 있는 장마오는 영도소조에서 왕성한 활동을 한다. 그는 영도소조가 회의를 할 때면 사회를 맡아 토론을 주도했고 의사결정과정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같은 성과를 토대로 2009년 55세의 장마오는 위생부 서기로 승진했다. 장마오는 2009년부터 3년동안 8500억위안을 투입해 농촌주민들까지 커버하는 의료보장체계구축작업을 벌이고 있다. 국무원은 2009년 의료개혁영도소조를 만들었으며 조장에 리커창(李克强) 부총리를 임명했다. 장마오는 부조장에 임명됐다. 장마오는 “신의료개혁은 기본의료위생제도를 공공상품으로 만들어 모두에게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며 “이를 통해 인민들은 병이 적게 걸리고, 병에 걸리면 보장받으며, 병원에서 진찰받기 편리하고, 의료비 부담이 줄어드는 네가지 혜택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중국 전역에 공익의료시스템을 구축하기에는 중국의 의료인력과 의료기술의 질과 양이 부족한 실정이다. 또한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며 사회보장제도를 구축해본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은 작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단계 더 높은 곳으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는 장마오의 어깨에 풀기 어려운 숙제가 부여돼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