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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조용성 특파원) “징수이부판허수이(井水不犯河水, 우물물이 강물을 침범하지 않는다)” 2010년 11월 왕광야(王光亞) 홍콩마카오사무판공실 주임은 홍콩의 정치인들이 중국 법원의 사회운동가 실형선고에 대해 문제점을 제기하자 이같이 우회적으로 입장을 표명한다. 이는 과거 장쩌민(江澤民) 주석이 영국 총리에게 내정간섭을 삼가하라는 뜻으로 했던 표현이기도 하다.
중국 국무원 산하에 있는 홍콩마카오사무판공실은 중국의 특별행정구인 홍콩과 마카오의 정책 등을 관할하는 행정 기관이다. 주로 홍콩, 마카오와 중국 본토의 경제, 과학, 교육등의 협력 및 교류를 촉진하며, 중앙정부 사이의 소통을 담당하는 역할을 한다. 때문에 왕광야의 발언은 중국 정부의 공식입장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왕광야의 발언은 베이징(北京)에서 `멜라민 분유‘ 피해자 부모들의 대표로 활동하다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자오롄하이(趙連海) 사건과 관련해 홍콩 출신 전국인민대표들이 자오롄하이의 석방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중국 최고인민법원에 보낸 데 대한 반응이었다. 이 발언은 홍콩사회에 대한 경고로 해석되며 파문을 낳았다.
이듬해 1월 왕 주임은 “1국2체제(一國兩制)’하에서 홍콩의 많은 정책이 행정장관 혹은 특구정부에 의해 결정된다”면서 “우물물이 강물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발언의 진의는 중국과 홍콩의 사법제도가 사로 간섭해선 안된다는 것”이라고 한발 물러서는 유연성을 보이기도 했다.
중국내 다자외교의 최고 달인으로 불리는 왕광야는 2010년 10월 외교부 상무부부장에서 홍콩마카오판공실 주임에 임명됐다. 그의 후임 외교부 상무부부장은 장즈쥔(長志軍) 당시 외교부 아시아담당 부부장(차관)이었다. 왕광야는 중국의 국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외교수요도 넓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 정부가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카드 중 하나다. 그에게는 외교부장이나 외교담당 국무위원 혹은 부총리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장쑤(江蘇)성 푸닝(阜寧)이 조적인 그는 1950년3월 상하이(上海)의 일반가정에서 태어났다. 1963년 상하이 외국어학원 부속중학교에 입학했다. 문화대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스스로 지식청년으로 등록했으며 혈서를 써 혁명을 다짐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1968년 헤이룽장(黑龍江)성 수이빙(水氷)현으로 하방됐다. 4년동안의 지식청년생활을 한다. 이듬해인 1969년에 전바오다오(珍寶島)사건(중소 국경경비대간의 충돌사건)이 발생하자 왕광야는 주동적으로 전쟁에 참가하기도 했다.
왕광야는 1972년 국경지역의 기관총연대 지도원이 돼 있었다. 이해 외교부는 외국어학교를 3년이상 다녔던 학생들 중 실력이 뛰어난 사람을 선발해 영국으로 유학 보내게 했다. 이때 선발된 학생들로는 왕광야를 비롯해 양제츠((楊潔지<兼대신虎들어간簾>) 현 외교부장, 저우원중(周文重) 전 주미대사, 사쭈캉(沙祖康) 전 UN 부비서장, 룽융투(龍永圖) 전 대외경제무역부 부부장 등이 있다.
런던에서 유학하던 기간에 왕광야는 함께 유학와 있던 천산산(陳珊珊)을 만나고, 둘은 연인관계로 발전했다. 천산산은 건국후 제2대 외교부 부장이던 천이(陳毅, 1972년 사망)의 딸이다. 천이는 10대 원수의 한 사람으로 정치국 위원, 군사위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 겸 외교부장을 역임했다.
천이는 천산산이 어렸을때부터 외국어학원에서 공부하게끔 했으며, 영국 방송국에서 사용하는 언어교과서를 선물하기도 했다고 한다. 천산산 역시 문혁으로 인해 학업이 중단됐고, 베이징군구 261병원의 간호사로 활동했다. 1976년 둘은 귀국해서 결혼했고, 함께 중국 외교부 번역실 영문팀에 배치됐다. 왕광야의 외교관 인생은 이렇게 시작됐다.
외교부 번역실에서 반년을 일한 왕광야 부부는 중국 UN대표단의 직원으로 뉴욕에 파견됐다. 1980년 6월 천추(陳楚)가 UN대사를 그만둔 후 1년이 지나지 않아 왕광야는 존홉킨스대학의 고급국제문제연구학원에서 공부했다. 졸업후 왕광야는 UN으로 다시 돌아갔고 1년후 외교부 국제사로 돌아왔으며, 1986년에 처장으로 승진했다.
1988년 왕광야는 다시 UN으로 파견돼 4년동안 근무한다. 이 당시 그는 걸프전, 캄보디아 평화협상 등 중요한 외교사안협상에 참여했다. 1998년 왕광야는 외교부부 부장조리(차관보급)에 임명됐고, 1999년에 국제조직, 군축 조약법률사무의 부부장을 맡아 다자외교사무를 맡았다. 2003년 UN대사 왕잉판(王英凡)가 퇴직했고, 8월 왕광야가 UN대사로 임명됐으며 4년후인 2007년 귀국해 외교부 상무부부장에 임명됐다.
천산산도 이때 함께 귀국해 외교부 부녀공작위원회 주임을 맡았다. 이전에 그는 중국 UN대표부 공사를 지냈고, 에스토니아 대사를 지냈다. 사이에는 아들이 한명 있으며, 베이징공업대학을 졸업했고, 증권회사에 다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