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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조용성 특파원) 장바오순(張寶順) 안후이(安徽)성 서기는 공청단파 핵심 중 핵심이다. 공청단파로 분류되는 인사들 중 가장 핵심적인 인사들이라면 단연 후진타오(胡錦濤) 주석과 함께 1983년에서 1985년사이에 공청단파 중앙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이 꼽힌다. 리커창(李克强) 상무 부총리, 리위안차오(李源朝) 중앙조직부장, 류옌둥(劉延東) 국무위원, 류치바오(劉奇葆) 쓰촨(四川)성 서기, 장바오순, 위안춘칭(袁純淸) 산시(山西)성 서기 등이 이에 속한다.
장바오순은 1980년대 공청단 중앙서기처에서 리커창보다 서열이 높았다. 하지만 장바오순은 톈안먼(天安門)사태때 공산당 중앙의 지침에 소극적이었다는 이유로 같은 나이의 리위안차오와 함께 1990년대를 한직에 머물게 된다. 이때부터 다섯살 동생인 리커창이 장바오순과 리위안차오를 앞서나가게 된다. 이후 장바오순은 공청단파의 수장격인 후진타오 주석이 인사권에 서서히 힘을 발휘하던 2000년에 산시(山西)성으로 이동하게 된다.
◆공청단 중앙에서 14년 근무
장바오순은 1950년 2월 허베이(河北)성 친황다오(秦皇島)에서 태어났다.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1968년 친황다오 항만사무국 부두 노동자로 사회생활 첫발을 내딛었다. 이후 항만사무국 당 지부 간사에 올랐고 1973년부터는 친황다오 항만사무국 공청단 서기로 일했다. 1975년에는 항만사무국 부서기로 승진했다. 청년리더로서 두각을 드러내자 1979년 공청단은 베이징 중앙무대로 그를 불러올렸다.
공청단 중앙에서 청년노동자부 간사, 부처장, 부부장을 차례로 역임한 이후 1982년 공청단 중앙후보위원에 올랐다. 그리고 1985년에는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에 임명돼, 1993년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 기간동안 그는 1987년 인민대학에 입학해 마르크스 레닌주의 이론을 전공했으며 1992년에는 지린(吉林) 대학 경제관리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어 그는 1993년에 중국 국영통신사인 신화사의 부사장으로 이동한다. 실질적 권한이 없는 이른바 한직인 신화사 부사장으로 8년을 근무한다. 공청단 중앙서기처에서 함께 근무했던 리위안차오 역시 1990년부터 11년동안을 중앙대외선전소조와 문화부에서 일한다. 실질적 권한은 없었다 하더라도 장바오순은 신화사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으려 노력했다. 신화사의 기자들과 다양하게 접촉했고 상당한 인적 네트워크를 쌓았다. 특히 정부의 정책을 인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공무원들과 언론계 인사의 교류가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다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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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동안 산시성 탄광사고와 싸우다
장바오순은 2001년 9월 산시성 부서기 겸 산시성 당교 교장으로 전보됐다. 2년 반 뒤에는 산시성의 대리성장에 당선됐고 2005년 7월엔 산시성 서기에 올랐다. 그는 2010년까지 9년여를 산시성에서 근무했다.
2001년부터 9년동안 그는 줄곧 각종 탄광사고의 어려움에 직면했다. 9년동안 줄기차게 개선을 시도했지만 탄광사고는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산시성은 네이멍구자치구에 이어 중국에서 석탄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곳이다. 네이멍구자치구는 최근 개발된 광산이 많아서 시설이 현대화된 만큼 사고가 적은편이다. 하지만 산시성은 1900년대 초반에 지어진 광산이 많으며 대부분 갱도가 길고 시설이 노후화돼 있다. 특히 예전에 만들어놨다가 폐광조치됐거나 진입허가가 취소된 광산이 많다. 이같은 광산은 시설이 특히나 열악하다.
하지만 값싼 노동력을 동원해 야간에 몰래 들어가서 채광해와서 팔면 바로 현금으로 교환할 수 있으며 세금도 내지 않아도 된다. 화력발전소가 많은 중국은 항상 석탄의 수요가 달린다. 게다가 석탄가격이 천정부지로 뛰는 상황에서는 손쉽게 큰 돈을 만질 수 있다. 산시성에 탄광사고가 잦은 대체적인 이유다.
2004년 1월12일 장바오순이 산시성 대리성장을 맡은 첫째날 그는 전국 석탄 업무회의에 참석해 개막사를 통해 “2003년에 산시의 석탄 공업이 현저히 발전했지만 석탄생산의 안전성은 아직 낙관적이지 않다”고 근심을 내비쳤다. 곧이어 2건의 대형광산사고가 터져나오며 그를 짓눌렀다. 2월에는 린펀(臨汾)에서 불법 석탄광 갱도지하에서 폭발사건이 일어나 29명이 사망했다. 4월에는 산시성 석탄개혁회의를 린펀에서 열었지만 회의 3일 후 린펀시의 한 광산에서 가스폭발사태가 발생해 36명이 죽는 사건이 일어난다.
◆민영화, 구조조정에도 속수무책
공로를 인정받아 산시성 성장이던 그는 2005년 봄 성급 지도자 평가에서 리위안차오 당시 장쑤성 서기, 왕치산(王岐山) 베이징 시장, 한정(韓正) 상하이 시장 등과 함께 최우수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이어 그해 7월 장바오순은 산시성 서기로 승진했다.
당 서기에 오른 장바오순은 2006년 1월 새해 첫 외부행사로 역시 탄광을 찾았다. 산시성의 큰 탄광 중 하나인 자오메이(焦煤)그룹 산시석탄전기공사를 찾아 갱도 입구에서 막장까지 탄차(炭車)를 타고 7km를 들어간 뒤 다시 1km를 걸어들어가 작업장을 둘러보았다. 그는 탄광사고 방지를 위해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2007년 국제 석탄가격이 급등하면서 무리한 채굴이 이어졌고 광산사고는 다시금 빈발하게 된다. 특히 그동안 공을 들였던 린펀시에서 105명이 사망하는 광산사고가 발생해 장바오순을 망연자실하게 했다.
이후 장바오순은 2008년부터 석탄기업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영세화된 석탄기업들을 합병을 통해대형화시키면 안전에 대한 투자가 용이해질 것이라는 판단에서였지만 결과는 그리 바람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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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난당(晉官難當)
탄광사고는 지도자의 커리어에 오점을 남긴다. 많은 관료들이 탄광사고로 인해 자리를 잃었다. 장바오순은 서기로 재임하는 5년동안 세 명의 성장과 손발을 맞췄다. 특히 2009년 린펀시에서 일어난 탄광사고로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측근인 멍쉐눙(孟學農) 산시성장이 낙마한 것은 뼈아픈 대목이었다. 멍쉐눙은 성장직을 물러나며 ‘진관난당(晉官難當, 산시성(옛 진나라) 관리를 하는게 쉽지 않다)’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멍쉐눙의 전임자는 위유쥔(于幼軍) 성장이었다. 위유쥔은 선전시 시장 출신으로 많은 외자를 도입할 것으로 기대됐지만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역시 탄광사고로 낙마했다. 후임성장인 멍쉐눙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정치력에 공청단파의 막강한 지원을 지니고 있었지만 결국 경질됐다. 현재 성장인 왕쥔(王君)은 석탄기업에서 잔뼈가 굵은 석탄전문가로 상대적으로 장수하고 있다.
산시성의 린펀 시장도 왕궈정(王國正), 리톈타이(李天太), 류즈제(劉志杰)에 이어 현재 뤄칭위(羅淸宇)까지 세차례나 물갈이 됐다. 린펀시 서기 자리는 적임자를 찾지 못해 6개월동안 공석으로 남겨진 적도 있었다.
이 같은 잦은 인사교체 속에서 장바오순은 5년여 산시성 서기직을 수행한 후 지난해 5월 공청단파 핵심인사인 위안춘칭 전 산시(陝西)성장에게 산시성 서기직을 넘긴다. 그리고 본인은 안후이성 서기로 이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