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시대 핵심100인]<37>쑨춘란 – 시계공장 노동자 출신 중국 세번째 여성 서기

2011-07-29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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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조용성 특파원) 2009년 12월, 중국에 20여년 만에 여성 성(省)서기가 탄생했다. 주인공은 푸젠(福建)성 서기에 임명된 쑨춘란(孫春蘭) 중화전국총공회 제1서기였다. 중국언론은 물론 해외언론들도 쑨춘란의 푸젠성 서기 등극에 큰 의미부여를 했고, 특히 여성 서기라는 점에 스폿라이트를 집중시켰다.

중국에서 여성 성서기는 1949년 신중국 건국 이후 1977년 허베이(河北)성 서기에 임명된 뤼위란(呂玉蘭)과 1985년 장시(江西)성 서기에 임명된 완샤오펀(萬紹芬) 등 2명밖에 없었다. 중국의 한 개 성에는 공산당 위원회 서기가 있고 그 밑에 성정부 성장이 위치한다. 보통 성장은 각 성의 공산당 위원회 부서기를 맡아 서기를 보좌한다. 서기는 소규모 국가 하나에 해당하는 중국의 대형 지방행정단위의 수장인 셈이다.

중국에서 부총리와 국무위원 등 중앙요직에 여성이 기용된 사례는 있지만 성서기에 임명됐던 여성은 그 동안 2명에 불과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듯 쑨춘란의 푸젠성 서기 등극은 매우 이례적이다. 때문에 당시 외신들은 중국에서도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확대되고 있는 만큼 쑨춘란의 서기 발탁을 기폭제로 더 많은 여성 서기들이 출현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앞다퉈 보도했다.

당시 17대 중앙위원회 제4차대회에서 쑨춘란과 함께 성 서기에 임명된 인사는 모두 다섯명이었다. 쑨춘란의 전임자인 루잔궁(盧展工)이 허난(河南)성 서기로 이동했으며, 지린(吉林)성 서기였던 왕민(王珉)이 랴오닝(遼寧)성 서기로, 쑨정차이(孫政才) 농업부장이 랴오닝성 서기로, 허베이(河北)성 성장이던 후춘화(胡春華)가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서기로 옮겨갔다. 이들 다섯명은 모두 2012년에 열릴 18대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국위원으로 승진이 유력시되는 중국 정계의 거물들이다. 게다가 후춘화와 쑨정차이는 시진핑 국가부주석에 이은 차차기 국가주석을 바라보고 있는 후보군들이다. 이들과 같은 시기에 인사발령이 난 자체가 쑨춘란에게는 의미있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게다가 이처럼 20년만에 등장한 여성 성서기라는 상징성으로 인해 그는 대중적인 지명도까지 확보했다. 이로써 쑨춘란은 내년에 열릴 18대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국위원 후보군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게 됐다. 



◆주요임무는 양안관계 촉진

쑨춘란이 푸젠성 서기로 발탁된 것은 그가 대만과 좋은 관계를 맺어오고 있다는 점도 작용했다. 푸젠성은 대만과 마주보고 있으며 양안(兩岸) 관계의 최전선에 위치해 있다. 쑨춘란이 푸젠성 서기로 부임하자 마자 “매우 영광스럽지만 그만큼 책임이 막중해 어깨가 무겁다면서 ”양안간 경제 무역 발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포부를 밝힌 것은 그의 주요한 임무가 양안관계에 있음을 시사했다.

쑨춘란은 2001년 다롄(大連)시 서기시절부터 대만과의 관계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당시 다롄은대만과의 교류가 활발한 상황이었고, 쑨춘란은 그의 임기중에 대만의 교류협력관계를 대폭 강화시켜 놓았다. 현재 다롄에 투자한 대만기업은 1100개에 달하며 투자액은 30억달러를 넘어섰다.

다롄시 서기시절 그는 수십차례 대만기업들을 방문했고, 대만기업들의 애로사항을 해결해줬다. 그는 당시 “대만기업은 다롄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며, 동북지역의 노후한 공업기지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2005년 베이징에 입성해 전국총공회 제1서기에 오른 후에도 쑨춘란은 대만과의 관계를 유지했다. 그녀는 여러 차례 양안문제 때문에 푸젠성을 방문하기도 했었다. 2007년 6월 ‘제5차중국푸젠교역회’에 참석하기도 했으며 그 밖에도 여러 차례 푸젠성을 찾았던 쑨춘란은 많은 대만기업가들과 만나 네트워크를 다졌다. 2009년 양안해협 공회포럼이 베이징에서 개최됐을 때, 그녀는 연단에 올라 중국공회와 대만공회와의 협력을 제안하기도 했다.

◆”푸젠성 인민들이 자랑스럽다”

푸젠성 서기로 취임한 후 3개월여 지난 2010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그는 중국신문사와 가진 인터뷰에서 “푸젠의 인민들은 봉사정신이 뛰어나며 승부욕이 강하다”면서 “세계각지에 1200만명이 넘는 푸젠성 출신 화교가 있으며 그들은 뛰어난 성과를 거두고 있다. 나는 푸젠성 출신 화교들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푸젠과 대만은 지리, 혈연, 문화, 상업, 법률 등 5가지 방면에서 공통점이 많다”며 “푸젠성은 2009년 25억달러의 대만자본을 유치했으며 이제껏 160억원의 투자를 받았다. 2009년 무역액은 70억달러고 누적무역액은 400억달러에 달한다. 푸젠성은 대만과의 교역에 있어서 오랜기간 축적된 경험이 있으며 이를 푸젠발전의 기반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그해 6월 중국과 대만은 자유무역협정(FTA)에 해당하는 경제협력 기본협정(ECFA)을 체결했다.

◆시계공장 노동자로 사회첫발

쑨춘란은 1950년 5월 허베이(河北) 라오양(饒陽)에서 태어났다. 1965년 랴오닝(遼寧)성 안산(鞍山)공업기술학교에서 기계과를 전공한 후 1969년 안산시의 시계공장 노동자로 사회첫발을 내딛었다. 시계공장에서 5년을 근무했다. 이 곳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쑨춘란은 1973년 공산당에 입당했고, 그해 공장내의 공청단 책임자에 올랐다.

이듬해인 1974년 안산시 제1경공업국 공청단 서기로 이동했고 4년여 근무했다. 5년동안 공청단 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그는 공청단파로 분류되곤 한다. 하지만 성 위원회의 공청단 서기도 아니며, 그렇다고 시 위원회의 공청단 서기도 아닌 시 경공업국에서 공청단 서기를 했기 때문에 그의 공청단 색채는 다소 엷다고 할 수 있다.

1978년에는 안산 화셴마오(化纖毛) 방직공장 간부로 이동했으며, 부공장장을 거쳐 공장 당서기까지 올라갔다. 여성으로서 기층노동자에서 출발해 시 경공업국을 거쳐 공장의 당서기까지 오르는 등 왕성한 사회활동을 한 점이 인정돼 그는 1988년 안산시 부녀연합회 주임으로 발탁된다.

안산시에서 차근차근 승진을 지속해온 쑨춘란은 1991년 랴오닝성 성정부로 옮겨간다. 성정부에서 처음 맡은 직책은 총공회 부위원장이었다. 2년후인 1993년에는 랴오닝성 부녀연합회 주석에 올랐으며, 이듬해에는 랴오닝성 총공회 서기로 발탁됐다. 당시 랴오닝성은 낙후된 공업단지가 많았고, 대규모 노동자가 존재한 만큼 공회의 활동이 활발한 편이었다. 그는 총공회서기를 3년여 역임한 다음 보시라이(薄熙來)의 후임자로 다롄시 서기에 발탁됐다. 



◆총공회 부주석으로 베이징입성

랴오닝성에서 40여년을 활동한 쑨춘란은 2005년 드디어 베이징 중앙정치무대로 진출한다. 그가 맡은 직책은 전국 총공회 제1서기였다. 당시 전국총공회 주석은 왕자오궈(王兆國)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 부위원장이었다. 왕자오궈는 2002년부터 현재까지 주석직을 유지하고 있다. 전국총공회의 주석직은 사실상 이름만 걸어놓는 자리이며 사실상 총지휘는 제1서기가 한다. 시계공장 노동자 출신인 쑨춘란이 사실상 전국총공회를 이끄는 자리에 오른 것이다.

전국총공회는 중국 전역에 분포해 있는 공회(노동조합)의 연합체로 볼 수 있다. 공산당의 하부조직으로 1925년 결성됐으며, 1966년 문화대혁명때 해체됐다가 1974년 재건됐다. 현재 세계노동조합연맹에도 가입돼 있다. 하지만 중국의 전국총공회는 우리나라의 한국노총이나 민주노총은 물론 여느나라의 노동조합 연합체와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우선 중국은 당과 정부가 통제하는 공회 이외의 독립노조 설립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공회 가입률은 약 70%에 이르지만, 공회는 노조를 표방하면서도 공산당의 하부조직이기도 하다. 전국총공회 간부들은 정부로부터 급여를 받는 공무원이며, 민영기업의 공회 대표들은 기업 고위 임원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공회의 활동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구조다.

때문에 2010년 공회의 파업이 한창 일어났을 당시 공산당과는 무관한 공회의 출현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일기도 했다. 당시 창카이(常凱) 런민(人民)대 노동관계연구소 교수는 “노조 간부들이 노동자들에 의해 선출되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들을 대변하지 않는다”며 독립노조의 필요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노조설립 적극 독려해

쑨춘란은 2007년 전국총공회 제1서기의 자격으로 ”회사의 동의가 없어도 공회를 만들 수 있어야 하고 또 그렇게 되도록 할 것”이라며 “현재 60%대에 머물고 있는 외자 기업의 공회 설립률을 내년 가을까지는 70%로 끌어올릴 방침“이라고 말해 외자기업들을 긴장시켰다. 당시 외신들은 중국공산당이 전국총공회를 앞세워 중국에 진출한 외지기업들을 압박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중국의 노동법에는 노동자가 자율적으로 공회를 설립할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외자 유치 등을 위해 지방정부 등이 관례적으로 회사의 입장을 적극 반영해주었다. 쑨춘란은 ”외국 기업들은 중국에 들어와서 영업하고 있는 한 중국법을 충실히 지켜야 한다“며 “공회 설립이 회사 경영에 방해가 된다는 서방식의 그릇된 관념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쑨 부주석은 “공회는 노동자의 편도 자본가의 편도 아니며 둘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고 또 문제를 원만히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존재”라고 전제한 뒤 “회사 사장들이 제대로 된 임금을 주지 않고 일을 시키면 직원들이 성심껏 노동을 하지 않고 이것은 회사의 손해로 직결된다는 단순한 사실을 기업인들이 깨달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전국총공회의 이 같은 방침은 3년뒤인 2010년 폭스콘, 혼다, 도요타 등 외자기업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이어지는 단초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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