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좌는 외로운 자리다. 또 치열한 경쟁을 하지 않고는 지킬 수 없는 자리다. 대통령 측근은 국정운영의 부담을 덜어줬고, 대통령 라이벌은 ‘권력의지’를 강화시켰다. 대통령 퇴임과 동시에 잊혀지거나 혹은 새로운 권력을 획득한 이들의 행보를 들여다봤다.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를 누린 대통령의 2인자들은 반세기 동안 영욕의 세월을 보냈다. 이들은 운명은 대통령의 최후나 퇴임 후가 그리 아름답지 못했던 것처럼 질곡을 거듭했다. 권력형 비리에 휘말려 구속되거나, 정치보복을 당하기도 했다. 또 ‘자의반 타의반’ 외유 길에도 올라야 했다. 이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의리파’ 장세동, 전두환 지근거리서 보좌
7년간 철권통치를 휘두른 전두환 전 대통령의 2인자는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다. 장 전 부장은 전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 중 5년을 경호실장, 안기부장으로 보좌했다. 퇴임 후 세차례나 구속됐지만 끝까지 ‘주군’을 보호해 ‘전두환의 영원한 경호실장’ ‘의리의 사나이 돌쇠’ 등의 별명을 얻기도 했다.
실제 1988년 5공비리 청문회에서 정당 의원에 이어 두번째 질의자로 나선 평민당 손주항 의원은 ‘모든 배후엔 장세동이 있다. 전두환씨 대신 자결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며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그만큼 장 전 부장은 전 전 대통령을 적극 옹호하고 변호했기 때문에 야당의원의 공분을 산 것이다.
그가 2002년 대선출마(선거일 하루 전 사퇴) 당시 그의 출사표에는 그의 우직함이 잘 묻어있다. “그동안 정당들은 대통려을 3명씩이나 쫓아냈다(탈당을 요구했다). 이런 걸레정치를 박살내고 차리리 무소속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
장 전 부장은 지금도 전 전 대통령을 모시고 있다. 평화의 댐 방문 등에서 근접 경호를 하고 있다.
◆‘6공의 황태자’ 박철언, 대북관계 강연 정치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는 처고종사촌인 박철언 전 체육청소년부 장관이 ‘LP’로 불렸다. ‘Little President ’로 소(小)통령이었다. 노 전 대통령 취임 후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전국구 의원을 지냈고, ‘6공 황태자’로 불리며 정무 제1장관, 체육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시련은 노 전 대통령 임기 말 시작됐다. 3당합당 이후 14대 국회의원(“대구 수성갑)으로 재선됐지만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대표와 갈등을 빚었다. 결국 14대 대선이 있던 1992년 민자당을 탈당한 후 대선때는 김영삼 당시 민자당 후보와 맞서 정주영 통일국민당 후보를 지원했다.
이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슬롯머신 사건’으로 의원직을 상실하고 철창 신세를 졌다. 이후 박 전 장관은 또 한번 ‘주군’을 바꾼다. 1995년 김종필 전 총리가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자 여기에 합류했고, 1997년 15대 대선에서는 ‘DJP’ 연합에 성공하면서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를 지원해 당선시켰다.
2000년 정계 은퇴 후 한반도 복지.통일연구소를 만들어 활발한 강연활동을 펴고 있다. 1985년부터 1991년까지 대통령 밀사로 남북 비밀회담을 42번이나 했던 저력을 ‘화백’(화려한 백수)로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불운의 정치인’ 최형우, 대권 좌절 후 뇌졸증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우, 최형우 전 내무부장관이 사실상 ‘2인자’였다. 최 전 장관은 김동영 전 의원과 함께 ‘좌형우 우동영’으로 불리는 김 전 대통령의 상도동 가신그룹이었다. 최 전 장관은 전두환 맞서 민주화 운동에 선두에 섰다.
김영삼 정부 출범 후 여당인 민주자유당 사무총장을 맡아 소속 의원들의 재산공개를 주도하는 등 당개혁에 앞장섰다. 이어 내무부 장관으로 입각했으며 1996년 총선에서는 6선의 고지를 밟으며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로 발돋움했다.
당시 여당의 대선 후보자리를 놓고 이회창 신한국당 고문과 일전을 벌이다 1997년 3월 뇌졸증으로 쓰러져 사실상 정계를 떠났다.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 ‘불운의 정치인’으로 회자되고 잇다.
◆‘동교동의 맏형’ 권노갑, 만학도로 ‘열공’
‘동교동계의 역사이자 맏형’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2인자였다. 1960년대 초 김 전 대통령의 비서로 정치에 입문한 뒤 40여년을 김 전 대통령과 ‘동거동락’했다. 권 전 고문은 ”내가 죽으면 다른 것은 다 놔두고 비석에 ‘김대중 선생 비서실장’이라고 새겨주면 영광이여“라고 말하곤 했다. 동고동계를 이끌면서도 59세때 초선의원을 다는 등 궂은일을 마다치 않았다.
그러나 정작 김 전 대통령이 15대 대선에서 당선됐을때 그는 병원에 있었다. 그해 2월 한보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가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신병치료차 입원해 있었던 것이다.
김대중 정부 출범 해인 1998년 8.15 특사로 사면된 그는 일본으로 ‘자의반 타의반’ 외유를 떠나야 했다.
또 2000년 8월에는 자신이 영입한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 등의 ‘정풍운동’에 밀려 집권당의 최고위원(지명직)을 내놓아야 했고 사실상 정계를 떠나야했다. 노무현 정부에서도 시련은 계속됐다. 현대그룹에서 200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돼 2007년 2월 특별사면때까지 3년반을 철창안에서 보내야했다.
올해 81세인 권 전 고문은 한국외대 대학원(영문학 석사) 새내기로 합격했다. 8월말 시작되는 2학기때부터 그는 ‘만학도’의 길을 걷게 된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박사, 그 이상 계속 공부하고 싶다“는 권 전 고문이다.
◆‘왕수석’ 문재인, 야권 유력 대선주자로
참여정부의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대망론’을 일으키고 있다. 야권의 유력한 대선주자로 떠오르고 있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청와대 민정수석 2번, 시민사회수석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노 전 대통령 재임시절 ‘왕수석’으로 불렸던 그는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모든 직원에서 존댓말을 쓰기로 유명했다.
비서실장 시절에는 이해찬 당시 총리가 부적절한 관계에 있는 인사들과 내기골프를 쳤다는 소식을 듣고 고깃하던 끝에 노 대통령에게 해임을 촉구하는 등 원칙주의자로 유명했다.
그는 야권통합과 정권 환수를 위해 내년 대선전에 올인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서전 성격의 저서 ‘운명’에서 ”당신(노무현)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박근혜 대세론’에 맞선 야권의 유력주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친이계 좌장’ 이재오, 다시 여의도 정가로
이재오 특임장관은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친이(친이명박)계’ 좌장이다.
그러나 이 대통령 당선과 함께 그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압승했음에도 공천을 놓고 당내 ‘친이’‘친박(친박근혜)계’ 간 계파 싸움와중에 문국현 당시 창조한국당 대표에게 1만표차이로 낙선했다. 그후 미국 연수를 떠났고 2009년 9월에야 국민권익위원장으로 정.관계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 장관은 최근 사의를 표명했다. 한나라당으로 복귀를 서두르고 있다. 그는 지난 5월 원내대표 경선과 7.4 한나라당 작년 7.28 재보선을 통해 친박계와 쇄신그룹에 밀린 당내권력 환수에 시동을 걸 태세다. ‘박근혜 대세론’에 맞서 친이계 킹메이커를 자임하면서 대선예비경선 판을 흔들고자 한다. 이 장관 측근은 ”친이계 대권주자들이 잘 뛸 수 있도록 지역조직이나 구도를 만드는 데 이 장관은 모든 걸 바칠 것“이라고 귀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