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조용성 특파원) 올해 초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에서 불기 시작한 민주화 열기는 ‘재스민 바람’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에도 상륙했다. 중국 각지에서 소규모지만 간헐적으로 민주화를 촉구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중국당국은 이를 철저하게 봉쇄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다시피 했다. 인터넷에는 재스민을 뜻하는 모리화(茉莉花)라는 단어의 검색이 금지됐고, 당국 고위 관료들은 이에 대한 언급 자체를 회피하기 일쑤였다.
외교부 대변인들은 외신기자들의 질문에 “남의 나라 사정일 뿐이며 중국의 현실에 적용될 수 없다”며 애써 빗겨나갔다. 안정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중국의 지도자들이 긴장의 눈초리로 지켜봤던 재스민 바람에 대한 그나마 적극적인 발언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중국 최대의 갈등지역 중 한 곳으로 꼽히는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서기의 입에서 나왔다.
장춘셴(張春賢) 신장위구르자치구 당서기는 지난 3월8일 “중동사태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이 공개적으로 재스민 바람을 언급하고, 또 이 같은 전향적인 발언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 발언은 중국은 물론 외신을 타고 전세계로 퍼져나갔고, 중국내 네티즌들은 개방적이면서도 진솔한 자세에 기꺼이 박수를 보냈다.
장 서기는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 외신기자가 중동과 북아프리카사태와 재스민혁명에 대한 질문을 하자 잠시동안 생각을 가다듬더니 “우리는 기술적인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실업률이 50%가 넘어 인민들이 직업이 없는데 지도층은 부정부패로 얼룩져 있으면 그들이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장 서기는 “지속적인 경제발전과 민생안정, 부정부패 척결 등은 우리나가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장기적인 사회안정을 위해서는 경제개발을 지속해야 하고, 양질의 일자리를 인민들에게 제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트위터정치로 대중적 인기누려
당시 그는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微博) 정치’로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전인대가 열리던 지난 3월18일 장 서기는 웨이보를 통해 ‘민원’을 청취한후 지방관리들에게 주민의 제안과 요청을 제때에 처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앞서 장춘셴은 3월2일 밤 중국 유력 포털사이트인 QQ닷컴의 웨이보에 계정을 만들고 3일부터 14일까지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양회(兩會) 기간에 신장 개발 등과 관련해 1만건 이상의 건의를 받았다. 이어 신장위구르자치구 정부의 모든 부서들이 제안과 요청에 대한 답변과 조치를 정부 웹사이트를 통해 공개하라고 주문했다. 장 서기의 웨이보 팔로어 수는 30만명 이상이다.
그는 중국내에서 가장 개방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정치인으로 꼽힌다. 인터넷에도 능숙하며, 국제정세에도 밝고, 경제적으로도 국제화마인드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에 대한 존경심이 깊고 공산당에 대한 충성도도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장쩌민 전 주석과는 함께 일을 하거나 자주 얼굴을 마주칠 기회는 없었지만, 지인들의 인맥을 통해 교분을 쌓아온 만큼 범상하이방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성실하고 업무추진력도 높다. 그는 스스로도 인정하는 일벌레로 취미가 일과 독서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철도부장, 후난(湖南)성 서기 시절에도 소통에 능했고 실적이 좋았으며 중앙에서의 평가도 높았다. 또한 신장위구르자치구 서기를 역임하면서 신장 지역의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만큼 내년 열릴 제18대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국위원으로 승진할 가능성이 크다.
◆위구르사태 소방수 낙점받아
2009년 7월 200여명의 사망자를 낳은 신장위구르 유혈사태가 발생한 후 중국당국은 당시 서기인 왕러취안(王樂泉)의 후임자를 물색했다.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수습된 후 우루무치(烏魯木齊)시 서기는 경질됐지만 왕러취안은 서기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신장에서 서기직 15년을 포함해 모두 19년간 근무해온 왕 전 서기는 낙마설에도 불구하고 건국 60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즉각적인 경질은 “당지도부가 민중의 압력에 굴복했다”는 인상을 준다는 이유로 당서기 교체가 미뤄져 왔다. 게다가 적임자를 찾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이후 2010년 4월 중국 공산당은 장춘셴 당시 후난성(湖南省) 당서기를 왕러취안의 후임으로 신장지구 당서기에 임명했다. 신장의 다수민족인 위구르족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가장 개방적인 관료로 평가받고 있는 장춘셴을 낙점한 것이다.
◆”신장 안정을 확신한다”
그가 신장 서기를 맡은 후 현지사회는 안정을 찾았으며 아직까지 별다른 갈등이 표출되지 않고 있다. 장춘셴은 지난 3월 전인대기간에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신장지역의 사회안정을 묻는 질문에 “나는 이 순간 신장의 안정에 대해 확신을 하며, 전혀 걱정을 하지 않는다”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장 서기는 2009년 우루무치 유혈사태 이후 신장위구르 정부가 한동안 취했던 인터넷 폐쇄 조치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평가한 뒤 “장기적인 사회 안정을 원하려면 인민들이 개혁과 개방의 과실의 실제로 누리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신장의 치안은 현재 무척 안정적”이라면서 “우발적인 소요사태나 계획적인 테러에 대비한 만반의 계획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근본적으로 민생문제에 역점을 두고, 민족간의 차별을 방지하는 데 힘을 쏟아 장기적인 안정을 구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군인, 농민, 노동자 이어 정치입문
그는 1953년 5월생으로 허난(河南)성 위저우(禹州) 출신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곧바로 인민해방군에 입대해 4년3개월을 우한(武漢)군구 통신단 전사로 사회에 입문했다. 이후 고향인 허난성 위(禹)현의 인민공사인 청관(城關)공사의 둥관(東關)대대에서 농민으로 1년9개월을 일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1976년 그는 허베이(河北)성 친황다오(秦皇島)에 자리한 둥베이(東北)중형기계학원(현 燕山•옌산 대학)의 기계제조과를 졸업했다. 이후 2002년에 하얼빈공업대학에서 관리과학공정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둥베이중형기계학원을 졸업한 후 1980년 삼기(三機)부 116공장 15작업장에서 기술원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이어 기계부 제10설계연구원 계획과 계획원, 기계부와 기계위원회, 기전(機電)부 제10설계연구원 당위원회 서기, 기전부 제10설계연구원 부원장, 중국포장식품기계총공사의 총경리 등을 거쳤다. 그러던 그는 1995년 8월 윈난성 성장 조리(助理)로 발탁되면서 공직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윈난성 성장 조리로 재직할 때는 산악지형이 많은 윈난성의 특징상 대기업보다 소기업이 더 적합하다는 새로운 발상으로 철로 변압기 시장의 80%를 장악한 쿤밍(昆明)변압기와 프린터 업체인 블루컴퓨터 등 중소기업을 일궈냈다.
◆’5종7횡’ 교통부장
이후 1997년 교통부 부부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5년후인 2002년에 교통부장으로 승진했다. 교통부에서 근무한 8년동안 그는 발군의 실적을 거둔다. 교통부는 철로를 제외한(철로는 철도부가 관할) 도로, 수로 및 항공로 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부서다. 교통부장으로서 그의 최대 업적은 ‘5종7횡(五從七橫)’이라 불리는 3만5000㎞에 달하는 고속도로망의 조기 완성이다.
중국 전역을 가로 7개, 세로 5개의 고속도로로 바둑판처럼 연결했으며, 이에 따라 중국의 가장 북쪽인 헤이룽장(黑龍江)성에서 가장 남쪽인 하이난(海南)성의 남부 싼야(三亞)까지 장장 5200㎞의 고속도로가 뚫렸다. 또 중국 중북부의 네이멍구(內蒙古) 얼롄하오터(二連浩特)부터 중남부 윈난(雲南)성의 허커우(河口)까지 중국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3600㎞의 고속도로가 놓였다. 수도 베이징(北京)에서 푸젠(福建)성의 성도 푸저우(福州)와 광둥(廣東)성의 주하이(珠海)를 잇는 각각 2500㎞, 2400㎞의 고속도로도 새로 생겼다. 이밖에도 다수의 고속도로를 건설해 중국 전역의 주요 도시를 연결시켰다.
당초 ‘5종7횡’ 계획은 2020년까지 완성키로 돼 있었던 사업이다. 하지만 장 서기는 2007년까지 13년이나 계획을 앞당겨 대부분의 건설 계획을 마쳤다.
◆CCTV 리슈핑과 재혼
이후 2005년12월 그는 후난성 서기로 자리를 옮겨간다. 2005년 12월 후난성 서기 취임 이후 4년 만에 후난성은 전국 31개 성 가운데 GDP 상위 10위 안에 드는 성으로 발돋움했다. 농업대성으로만 불렸던 후난성은 2009년 해외직접투자 1위를 할 정도로 급속한 공업화를 이뤄냈다.
그의 부인은 CCTV 아나운서로 유명한 리슈핑(李修平)이다. 리슈핑은 1963년 간쑤(甘肅)성 란저우(蘭州)출신이다. 1987~1989년에 간쑤방송국에서 활동하다가 1989년에 CCTV로 이동해 메인뉴스 앵커자리를 꿰찼다. 단정하면서도 품위있는 외모로 중국인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으며 ‘나라의 얼굴’이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그는 1992년에 한 엔지니어와 결혼했다가 이혼해 2005년에 장춘셴과 재혼했다. 장춘셴 역시 재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