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시대 핵심100인] <31>장이캉 - 비서실 경력 18년, 쩡칭훙 신임 두터워

2011-07-14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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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조용성 특파원) “첫째, 몸소 실천하고 만인의 모범이 되겠습니다(身體力行, 以身作則). 모두들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하는 일은 누구보다 먼저 실행하고, 모든 사람이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습니다. 둘째, 공권력을 사적으로 유용하지 않겠습니다. 나 스스로 청렴한 정치를 펴는 것은 물론이고 가족이나 친척, 친지들 역시 엄격한 감찰의 대상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제 이름을 이용해 부당한 이익을 취하려는 자가 있다면 모두들 단호히 뿌리쳐 주길 바랍니다. 셋째, 스스로를 경계하고 스스로 반성하는 자세로 누구의 비판이라도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저를 비판하고 감독해주시는 것이야 말로 저에 대한 가장 큰 애정이며 지원입니다.”

2008년 3월31일 산둥(山東)성 서기로 부임한 장이캉(姜異康)이 산둥성 인민들에게 한 세가지 약속이다. 그는 지도자 취임사의 단골메뉴인 경제발전이나 윤택한 생활을 약속하지 않았다. 대신 청렴한 정치와 솔선수범의 자세를 내세웠다. 산둥성의 부패한 관료들에 염증을 내던 성민들은 장이캉의 약속에 반색했다. 이는 또한 계산적이기 보다는 통이 크고 의리와 정을 중요시하는 산둥성 인민들의 기질에도 맞는 발언이었다.
이어 그는 “저는 산둥에서 태어났습니다. 산둥의 물을 마시며 자랐습니다. 산둥 인민들이 제게 보내주신 무한한 애정과 도움을 나는 영원히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습니다”라며 고향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장이캉이 “그동안 업무로 인해 산둥을 떠나 있었지만 마음만은 줄곧 고향의 인민들과 함께였으며 고향의 발전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산둥을 그리워했습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산둥성 인민들은 그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장이캉은 또한 “저를 고향으로 보내준 중앙의 결정에 깊이 감사를 드리며, 당과 인민이 내게 준 이 기회를 살려 산둥건설에 매진해 고향인민들의 성원에 보답하고 싶습니다”고 말했다. 산둥성 인민들은 23년만에 고향에 돌아온 장이캉을 기꺼이 따뜻하게 환대했다. 고향을 떠나있던 23년 가운데 대부분의 시간을 그는 권부 핵심에서 비서로 근무했다.

◆18년동안 권부핵심에서 비서업무

산둥성 서기인 장이캉의 관료생활은 비서업무에 집중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2세의 나이인 1985년 중앙판공청 비서국 부처장을 맡은 이후 장이캉은 50세가 된 2002년까지 18년동안 중국 공산당 중앙에서 비서업무를 해왔다. 그는 공산당 지도자들의 일상사무를 돌보는 일을 했으며 민감하기 그지없는 권력의 핵심부에서 꿋꿋하게 자리를 보존해왔다.

비서국 문서전보처, 수발처간부, 부처장, 비서국 부국장, 중앙직속기관사무관리국 국장, 중앙판공청 부주임 등을 거치며 그는 실질적으로 중남해 고위층 정치인들의 일상생활을 관리하는 비서역할을 했다. 장이캉은 특히 중앙판공청에서 차오스(僑石), 원자바오(溫家寶), 쩡칭훙(曾慶紅) 등 세명의 주임을 상관으로 모시고 일을 했다. 이들 세명의 상사는 각각 국가부주석과 국무원 총리까지 올랐다. 때문에 그는 비서방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직장상사로 쩡칭훙이 오다

그의 관료생활에 전기가 된 것은 그의 직장상사로 쩡칭훙 전 국가부주석이 오면서부터다.
쩡칭훙은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이 상하이시 서기이던 시절 부서기로서 장쩌민을 보좌했으며, 장쩌민이 1989년 공산당 총서기로 발탁돼 상하이에서 베이징으로 올라올때도 쩡칭훙은 그의 참모로 동반입성했다.

1989년 중앙판공청 부주임으로 베이징에 입성한 쩡칭훙은 1993년 장쩌민의 반대파였던 양상쿤(楊尙昆) 당시 국가주석을 낙마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써 장쩌민은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하게 됐으며 쩡칭훙은 막후 실력자로 영향력을 강화하게 된다. 이후 쩡칭훙은 상하이방의 사실상 2인자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쩡칭훙은 1993년 중앙판공청 부주임에서 주임으로 승진했으며 중앙직속기관관리국 서기를 겸임했다. 1990년부터 중앙직속기관관리국에서 일하던 장이캉은 1993년 쩡칭훙을 직장상사로 맞게 된것.

◆차기 충칭서기 후보

쩡칭훙은 장이캉의 우직한 성격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신뢰관계로 발전시켰다. 이후 1995년 장이캉을 중앙판공청 부주임으로 승진시켰다. 중앙판공청은 공산당 총서기의 일상업무와 의전, 경호 등을 관장하는 곳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과 경호실을 합쳐놓은 기구에 해당한다.

장쩌민 시대 권부의 핵심에서 실력자들을 지켜봐왔던 장이캉은 상하이방 인사들과 더욱 깊은 관계를 맺게 되며 이는 그의 커리어에 상당한 추진력으로 작용했다. 장이캉은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공산당 총서기에 오르던 2002년 중앙판공청에서 물러나 충칭(重慶)시 부서기로 영전해간다. 쩡칭훙은 자신이 국가부주석이던 2006년 장이캉을 국가행정학원 부원장으로 발령내 그를 충칭에서 베이징으로 불러올렸다. 그리고 2008년 장이캉을 산둥성 서기에 적극 천거한 것도 쩡칭훙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쩡칭훙의 영향력은 아직도 건재해 있으며, 장이캉은 산둥성에서 큰 과오없이 서기직을 수행해오고 있는 만큼 내년 있을 18대전국대표대회에서 또 한차례 승진이 예상되고 있다. 홍콩이나 미국 매체들에 따르면 장이캉이 충칭시 서기로 이동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장춘윈 천거로 중앙 진출

장이캉은 산둥성 자오위안(招遠)사람으로 1953년 1월에 출생했다. 1969년부터 1974년까지 군에서 근무했으며, 1974년부터 1985년까지 산둥에서 초보관료로 일했다. 그는 1985년12월까지 산둥성 지난(濟南)시 위원회 판공실 과장이었던 장이캉은 중공 중앙판공실 비서국으로 옮겨가며 신분이 급상승한다. 이같은 승진인사는 함께 일하던 장춘윈(姜春雲) 전 부총리의 천거가 작용했다고 전해진다. 1982년부터 1985년까지 장이캉이 지난시 판공실에서 근무할 때 장춘윈은 산둥성 판공청 영도소조의 부조장이었다.

중앙으로 옮긴 그는 1995년 중앙판공청 부주임에 올라섰으며 2002년 충칭 부서기로 이동했다. 2005년 충칭시에서 싼샤(三狹)댐 건설과 관련된 주민이주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그해 연말 국무원부비서장이던 왕양(汪洋)이 충칭시 서기로 왔고 장이캉과 왕양은 반년동안 근무를 같이 했다.

2006년 7월에 베이징으로 돌아와 국가행정학원 상무부원장을 맡았고, 2007년에 중앙위원에 선출됐다. 장이캉은 지방관리에서 국가행정학원 부원장으로 발탁된 첫번째 인사다. 행정학원 당위원회 상으로의 서열은 서기였으며 장관급 직책이었다. 국가행정학원은 장관급 기관으로 원장은 전 국무원 비서장인 화젠민(華建敏)이었다.

◆”GDP보다 환경보호 우선”

2008년 3월 55세의 국가행정학원 상무부원장인 장이캉은 리젠궈(李建國)을 대신해 산둥성 서기로 임명됐다. 장이캉은 “GDP 성장률도 좋지만 환경보호를 위해서는 GDP를 포기할 수 있다”는 발언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이 발언은 장이캉이 2009년 5월14일 산둥성 환경보호국을 시찰한 자리에서 나왔다.

장이캉은 환경보호국 국장인 류푸춘(劉富春)의 안내에 따라 유역환경관리처, 성환경통제센터 등을 둘러봤다. 류푸춘 국장은 “산둥성의 환경보호 시스템은 총량감축을 철저히 준수하고 있으며 전력으로 전성환경보호 작업의 제도화 경상화, 데이터화를 추구하고 있고, 분명한 성과를 내고 있다”며 “2008년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성정부가 제시한 목표치에 도달했으며 60개 주요하천의 COD(화학적산소요구량)는 19.4%로 줄었다”고 보고했다.

보고를 들은 장이캉은 “GDP가 중요하긴 하지만 중대한 오염을 만드는 GDP는 필요치 않다”면서 “이미 뿜어져 나온 환경오염을 제거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GDP로 인한 효익보다 더 큰 경우가 많으며, 장기적으로 경제적 효익도 없다”고 말했다.

◆산둥성 2위투자국은 한국

장이캉은 GDP 성장률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냈다. 지난해 산둥성의 GDP는 전년 대비 12.5% 증가해 3조9400억 위안(한화 약 682조원)을 기록, 중국 전체 지역에서 3위를 차지했다. 외국인직접투자액(FDI)도 총 91억7000만 달러에 달했다.

지난해 연말기준으로 산둥성에는 총 2만1000개 한국 기업이 소재하고 있으며, 누적 투자액도 270억 달러에 달했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 60%가 산둥성에 투자하고 있다. 산둥성의 외국인 투자규모는 홍콩에 이어 한국 자본이 두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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