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민 서기는 지난해 4월 방한해 서울에서 랴오닝성 투자설명회를 개최했으며, 중국에 돌아가서는 한국의 새마을 운동을 배우고 싶다고 해 우리 국민들의 호감을 샀다. 올 1월에는 선양(瀋陽)에서 열린 대우조선해양과 르린(日林)그룹간의 협력 양해각서 체결식에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을 초청해 화제가 됐었다. 왕민 서기는 김우중 전 회장과 교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5월에는 중국을 방문한 최태원 SK회장을 만나 랴오닝성에서의 합작기회를 모색하기도 했다.
왕 서기는 북한관련 뉴스에도 자주 등장한다. 지난해 5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방중때 다롄(大連)에서 만찬을 함께 했으며, 지난 5월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때에도 단둥(丹東)역에 나가 귀국하는 김 위원장을 마중했다. 지난해 11월 최영림 북한 총리를 랴오닝성으로 초청해 경제협력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지난해 5월에는 직접 북한을 방문해 북한측 주요인사들을 만나 신압록강대교 건설방안 등을 논의했었다.
왕 서기는 한국이나 북한에서 근무했거나 공부를 한 경험이 없으면서도 우리 기업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우리나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분단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는 중국내 지한파 인사로 분류된다. 지한파인 왕민 서기는 이미 중국에서 행정능력을 인정받았으며 앞으로도 전도가 유망한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교수출신인 그는 쑤저우, 지린성, 랴오닝성에서 상당한 업적을 쌓았다.
내년 열릴 중국공산당 1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왕 서기는 2009년 12월에 랴오닝성으로 이동한 만큼 랴오닝성 서기직에 머무를 가능성이 있다. 또한 상하이시나 충칭시 등 주요 직할시 서기로의 이동도 가능하고, 국무원 부총리 직에 안착할 경우도 배제할 수 없다. 왕민 서기는 그동안의 성과가 좋았고, 후진타오 주석이나 원자바오총리의 각별한 신임을 얻고 있고, 장쩌민 전 주석의 호감도도 높은 것으로 알려져 진로의 폭이 넓은 상황이다. 내년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에서 정치국위원으로 올라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후진타오, 리커창과 동향
왕민은 1950년 3월 안후이(安徽)성 화이난(淮南)시에서 태어났다. 현재 중국은 안후이성 출신 정치인들이 꽤 많은 편이다.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태어난 곳은 상하이지만 원적은 안후이(安徽)성 지시(積溪)현에 두고 있어서 안후이사람으로 불린다. 권력서열 2위인 우방궈(오방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위원장도 안후이성 페이둥(肥東)출신이다. 리커창(李克强) 상무 부총리는 안후이성의 딩위안(定遠)에서 태어났으며, 왕양(汪洋) 광동성 서기도 안후이성 쑤저우(宿州)출신이다.
왕 서기는 관리로 발탁되기 전 오랫동안 대학교수로 지냈다. 그는 고향인 화이난석탄학원 기계전력과를 졸업했으며, 베이징항공학원 기계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화이난 석탄학원에서 교편을 잡다가 33세의 나이인 1983년 난징항공학원(현 난징항공우주대학) 기계제조과에 입학해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난징항공우주대에서 기계제조과 주임과 난징항공학원 비서장과 부원장을 거쳐 부교장까지 지냈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학문에 조예가 깊고 빈틈이 없으면서 매우 엄격하지만 성격은 활달하고 시야가 넓으며 포용력이 매우 크다고 평가한다. 강의 때는 아주 엄격했지만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과는 매우 친근하게 어울렸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 언론과의 만남에서 “관리를 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교수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쑤저우 공업원구의 주역
그러던 그는 1994년 장쑤성 성장조리(차관보급)로 발탁되며 관료의 길에 발을 들이게 된다. 왕민의 발탁은 장쑤성 차원에서 이뤄졌으며 싱가포르와 합작으로 설립한 쑤저우 공업원구(蘇州工業園區)의 개발을 위해서였다. 중국의 하이테크 공업단지인 수저우 공업원구 개발 계획을 입안하고 건설과 관리를 총지휘한 왕민은 당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비롯 선진국의 다국적 기업들을 다수 입주시켰다. 왕민은 당시 가장 성공적으로 외국자본, 특히 하이테크 분야의 외자를 유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1996년 장쑤성 부성장에 올랐으며 2002년에는 쑤저우 서기에 임명됐다. 그가 쑤저우시 서기로 재직하던 마지막 해인 2004년 쑤저우 공업원구의 연간 성장률은 무려 40%에 달했다. 이 지역 연간 무역액은 500억달러를 넘고 쑤저우 시민 소득은 2006년 1만달러를 넘어섰다. 쑤저우에서의 실적을 바탕으로 그는 낙후된 공업기지인 지린성 대리성장으로 임명된다. 이후 2005년에는 성장으로, 2006년에는 서기로 올라서며 지린성에서 5년여를 근무했다.
지린성에 부임해간 왕민은 현지의 열악한 환경에 놀랐다고 한다. 2004년 지린성의 GDP 총량은 2958억위안이었다. 그가 있던 쑤저우시의 GDP인 3450억위안에도 훨씬 못미치는 셈이었다. 그는 지린성의 발전을 위해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야 했고, 성민들에게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러일으켜야 했다.
◆’지린속도’ 제창해 지역에 활력
왕 서기는 2005년 1월 지린성 성장으로 취임한 뒤 ‘콰이쩌우(快走•빨리 걷기)에서 콰이파오(快跑•빨리 뛰기)로’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중국 동남부에 비해 크게 낙후한 지린성으로서는 ‘빨리 걷기’만으로는 부족하고 ‘빨리 뛰기’를 해야만 선진 지역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린성 정부의 일부의 관원은 “왕민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지린에 도착한 후 왕민은 성의 전 지역을 훑고 다녔으며 지역의 비즈니스를 몸소 체험하고 실천했으며 말을 짧게 했으며 서류작업도 간소화시켰고, 일처리의 속도를 높일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다”고 회고했다.
지린성의 공무원이 변하기 시작했고, 지린성의 기업가들이 변했고, 지린성 성민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지린성은 빠른 속도로 발전을 거듭해갔다.
왕민은 특히 2005년 9월2일 창춘(長春)에서 제1회 지린동북아투자무역박람회를 개최했다. 중앙 정부가 이를 정식 허가한 것은 같은 해 4월로 그는 단 5개월의 준비로 국제박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국제박람회를 준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최소 1년인 점을 감안할 때 매우 빠른 속도였고 이 일로 인해 왕민은 ‘지린(吉林) 속도’라는 별명이 붙었다.
실제로 왕 서기가 성장과 당 서기로 재직하던 5년간 지린성의 GDP는 2008년 6424억위안을 실현했다. 성장폭은 전국 제3번째로 높았으며 GDP 총량은 2003년에 비해 2.4배 늘어났다. 고정자산투자성장폭 역시 전국에서 세번째였으며, 2008년의 연간 투자액 역시 2003년의 5.8배를 기록했다. 도시 주민 일인당 가처분소득과 농민 국민 평균 순소득은 각각 1만2829위안과 4930위안으로 껑충 뛰었다. 이는 각각 각각 2003년의 1.8배와 1.9배였다.
◆국유기업 개혁에 박차
그는 지린성의 국유기업 개혁을 주창했다. 지린성은 당시만 해도 국유기업 위주의 경제체제였고 이는 신중국 건국이래 50년 이상 지속되면서 현지에 고착화됐었다. 비효율과 중복투자가 많았고 사업자체에 활력이 없었다. 그는 각계의 반발을 무릅쓰고 국유기업 개혁에 매진했다.
2009년 왕민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2005년 1년동안 기본적으로 816개의 국유 기업의 개조의 임무를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3366개의 국유기업 개혁을 완수했습니다. 이를 위해 229억위안이 투입됐습니다. 개조 후 국유기업들은 활력을 되찾았고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했으며 과거에 비해 투명한 기업환경이 조성됐습니다. 지난해 말 지린성의 국유기업 자산총량은 4118억위안으로 2004대비 1318억위안 증가하는 성과를 거뒀습니다”고 밝혔었다.
하지만 그의 국유기업개혁 작업은 한가지 뼈아픈 오점을 남겼다. 2009년 7월 퉁화(通化)시의 국영 철강사인 퉁화강철 노동자 3만명이 민영기업인 젠룽(建龍)그룹의 인수합병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인 것. 시위대는 젠룽에서 구조조정을 위해 파견한 천궈쥔(陳國軍) 사장의 사무실을 포위한 후 사정없이 구타해 천사장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퉁화강철의 아픔에도 건재과시
퉁화강철은 지린성의 국유기업으로 직원수가 5만명에 달했다. 몇 년 동안 경영난이 계속되면서 지린성의 구조조정 대상 1호가 됐다. 이런 가운데 지난 2005년 중국 최대 민영 철강사인 젠룽그룹이 퉁화강철의 지분 일부를 인수한 후 점진적으로 지분을 확대한다는 계약을 체결했다.
젠룽은 그해 7월 지분을 60%까지 확대시켰고 구조조정을 위해 천궈쥔 사장을 투입시켰다. 천 사장은 취임 이후 “퉁화의 모든 직원을 해고하겠다”고 말하는 등 직원들을 자극해 반감을 사왔다.
퉁화강철의 직원들은 급여를 삭감당해 월평균 급여가 300위안(약 6만원)에도 못 미치고 퇴임근로자는 매달 200위안의 생활비를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천 사장의 연봉은 무려 300만위안에 달했다. 분노한 노동자들이 천 사장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이로 인해 퉁화강철의 민영화방침은 철회됐다.
이 사건으로 인해 왕민 서기와 한창푸(韓長賦) 성장이 경질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4개월 후 왕민은 랴오닝성 서기로, 한창푸는 국무원 농업부장으로 이동하면서 중공중앙의 변치않는 신뢰를 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