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시대 핵심100인]<27>선웨웨 – 조직부 NO.2 공청단파 핵심 맹렬여성

2011-06-28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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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조용성 특파원) 선웨웨(沈躍躍) 중앙조직부 상무부부장은 조직(인사)분야에서만 13년째 근무하고 있는 인사전문가다. 그는 8000만 중국 공산당원 가운데 640만 간부의 인사를 좌지우지하는 중앙조직부의 상무부부장으로 당 간부 인사의 실무를 총괄하는 위치에 올라있다.

대부분의 간부인사는 선웨웨 부부장의 이름으로 발표가 되며 그는 인사 한명 한명에 대한 약간의 논평을 곁들인다. 2007년 11월 왕치산(王岐山) 부총리가 베이징 시장에서 물러날 때 선 부부장은 “왕치산 동지는 2003년 사스 발생 당시 베이징 시장을 맡아 5년간 베이징의 개혁과 발전을 위해 지혜와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지난해 12월 뤄즈쥔(羅志軍)이 장수(江蘇)성 서기로 임명됐을 때도 선 부부장은 “뤄즈쥔 동지는 지도자로서의 경력이 풍부하고 조직장악능력이 뛰어나며 업무추진능력이 강하다. 중공중앙은 뤄즈쥔 동지가 장수 서기직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다”고 논평했다.

지난해 8월 스중위안(石宗源) 전 구이저우(貴州)성 서기가 이임할 때도 그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평가를 대신한 것은 선웨웨였다. 그는 “스중위안 동지는 구이저우성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으며 이에 대해 중공중앙은 충분히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단순해 보일 수 있지만 이 같은 발언들은 상당기간 물밑에서 미묘한 조율작업을 거친 것이다. 중앙조직부의 결정은 어떤 사람에게는 환희를 줄 수도, 어떤 이에게는 절망을 줄 수도 있다. 인사조치에 반발이 있는 경우도 있다. 이 과정에서 당사자들과의 커뮤니케이션과 각종 의전조치들을 총괄하는 것이 선 부부장이다. 때문에 선웨웨의 발표가 끝나면 중국인들은 대체로 인사가 원만하게 마무리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인사이동을 발표하고, 이에 대한 평가를 통해 인사작업을 마무리 짓는 것은 상당히 민감한 작업이다. 선웨웨 부부장은 여성의 감수성과 부드러움으로 인사업무를 상당히 매끄럽고 원만하게 처리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과학인재 40만 양성해야”

물론 선웨웨 부부장에게 공산당 간부에 대한 인사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고위 간부에 대한 인사권은 대체로 정치국 상무위원회와 정치국 위원들이 가지며 중앙조직부는 인사풀을 관리하고 적재적소의 인재를 추천하는 입장에 있다. 선 부부장의 상사인 중앙조직부장 리위안차오(李源朝)는 정치국위원으로 중국 고위 간부들의 인사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선 부부장 역시 인사에 관한 의사결정 프로세스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인사전문가인 그는 최근 중국의 인재육성과 인사방침에 대한 확고한 생각이 있다. 그는 지난해 11월 공산당 기관지인 ‘실사구시’라는 잡지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 선 부부장은 “중국은 창조형 인재가 부족한 실정이며, 이는 중국의 경제발전과 과학기술발전의 제약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또한 그는 “중국은 인력대국이지만 경제발전 추세의 수요에 맞는 인재는 드물다. 또한 일부 지방에서 인재가 올바르게 양성되지 않고 있다”며 “세계 수준의 과학자와 과학적인 군대를 통솔할 지휘관, 기술수준이 높은 엔지니어 육성에 매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2020년 과학기술 인재 4만명을 양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 부부장은 2012년 18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조직부장으로의 이동이 점쳐지고 있다. 또한 지방정부 경험도 있기 때문에 지방의 서기로의 이동도 가능하다. 지난 2007년에는 선 부부장이 장시(江西)성 서기로 임명될 예정이라는 기사나 홍콩에서 나오기도 했다. 비록 장시성 서기로 이동하지는 않았지만 성 서기로의 이동이 충분한 커리어를 지니고 있는 것 만큼은 사실이다. 특히 선웨웨는 후진타오 주석과의 관계가 친밀하며 공청단계 핵심인사로 분류되기 때문에 요직으로의 이동이 유력해 보인다. 게다가 현재 공산당 중앙위원에서 정치국위원으로의 승진도 예상해볼 수 있다.

◆11년간의 공청단 경력

선웨웨는 1957년 1월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 시에서 출생했다. 그는 저장성 닝보(寧波)시 전안(鎮安)의 부식품 상점 노동자로 사회 첫발을 내딛었다. 이후 닝보 사범전문학교 수학과에 입학했고, 1980년 졸업한 후 닝보시제7중 교사로 재직한다. 제7중에서 공청단 위원회 부서기를 맡았으며, 이를 인연으로 1983년에 닝보시 공청단 부서기로 이동하면서 본격적인 공청단에서의 업무를 시작하게 된다.

그는 공청단 닝보시 서기를 역임한 후 1986년에는 저장성 공청단 부서기로 승진했고 1991년에는저장성 공청단 서기직을 거머쥐었다. 당시는 공청단파 인사들이 빛을 보지 못한 시기였다. 1989년 톈안먼(天安門)사태때 공청단이 정국안정에 기여하지 못했다는 평가와 함께 장쩌민이 중국의 실권을 쥐면서 리위안차오, 류치바오(劉奇葆), 장바오순(張寶順) 등 주요 공청단 인사들은 한직에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선웨웨는 저장성에서 행정경력을 쌓으며 고속승진을 거듭했다.

이는 그 지역에서 성장까지 지낸 부친의 덕을 본 것이라는 평이 있다. 선웨웨의 부친인 선쭈룬(沈祖倫)은 중국 공산당 제12, 13기 중앙위원으로 저장성 성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은퇴했다. 선쭈룬이 당시 정가를 주름잡던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나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 쩡칭홍(曾慶紅) 전 부주석 등과 인연이 있다는 이야기는 나오고 있지 않다. 하지만 성장을 지낸 만큼 저장성에 두터운 인맥이 남아 있었을 것이고 이는 딸인 선웨웨의 공직생활에 상당한 도움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것.


◆항저우, 사오싱, 안후이에서의 경력관리

선웨웨는 36세이던 1993년 공청단에서의 근무를 마감하고 저장성의 성도인 항저우(杭州)시의 부서기로 이동했다. 4년후인 1997년에는 저장성의 대표적인 공업도시인 사오싱(紹興)시 서기로 발령받았다. 사오싱시는 당시 외국자본이 물밀듯이 들어와 대규모 생산시설이 확충되고 있었으며 급속한 경제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관료로서는 성과를 내기 용이한 지역이었으며, 때문에 많은 관료들이 사오싱시로의 이동을 희망했었다고 한다.

사오싱시에서 2년여를 근무한 후 선웨웨는 저장성 조직부 부부장으로 승진해 이동했다. 이 때부터 선웨웨의 인사관리 인생이 시작된다. 저장성 조직부 부부장으로 발련난 뒤 1개월만에 그는 저장성 조직부장에 올라선다. 42세의 젊은 나이에 한 개 성의 최고 인사책임자 위치에 올라선 것. 저장성의 조직부장은 부성급(副省級, 우리나라의 차관에 해당) 직책이다. 이후 2001년에는 안후이(安徽)성 부서기로 전임됐다.

안후이에서 선웨웨는 주로 성 위원회의 조직, 당 간부학교 훈련, 기구의 편성 등의 업무를 했다.또한 주룽지 전 총리와 원자바오 당시 부총리가 강력하게 추진했던 농촌개혁을 인사업무분야에서 뒷받침했다. 당시 선웨웨는 농촌기업의 방대하고 비효율적인 관리방식에 과감한 메스를 들이댔다. 이는 비효율적인 농촌의 국유기업을 개혁하라는 중앙정부의 지시를 받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그 지역 농촌기업 관련 공무원 수를 40% 삭감하는 공로를 세웠다.

◆후진타오의 ‘홍안지기’

2002년 10월 열린 16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후진타오(胡錦濤)가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직에 올라서면서 선웨웨의 공직인생은 날개를 하나 더 달게 된다. 후진타오의 등극은 공청단 인사들에게 기회로 작용됐고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거대한 공청단파를 형성하게 된다. 공청단 저장성 서기를 역임했던 선웨웨를 후진타오는 2002년 중앙조직부 부부장으로 발탁해 베이징으로 불러올렸다. 당시 중앙조직부 부장은 장쩌민 전 주석의 최측근인사인 허궈창(賀國强) 현 중앙기율위원회 서기였다. 상하이방이 장악하고 있던 중앙조직부에 공청단 출신의 젊은 여성 관리가 진입했던 것.

선웨웨는 베이징에 입성한 이후 후진타오와 관계가 급속히 가까워졌다. 선웨웨는 후 주석을 자주만나 의견을 교환했고, 중앙조직부 내에서 후진타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둘의 사이가 가까워지면서 일각에서 선웨웨는 후진타오 주석의 홍안지기(紅顔知己, 정신적으로 감정을 나누고 말이 통하는 여성)라는 말도 흘러나왔다. 특히 선 부부장은 후 주석의 아내인 류융칭(劉永淸)과도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공청단파이며 후주석과의 각별한 관계 외에도 선웨웨는 인사책임자로서 상당한 강점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는 조직관리에 능하며 부드러운 통합의 리더십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는 법이 없고 매사 조심하고 신중한 성격으로 전해진다. 또한 성실하고 옷차림이 소박하며 말과 글에 본인만의 명확한 논리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청단파의 인사권 장악

그는 2007년 제17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조직부 상무부부장에 올랐다. 이 때 공청단파의 좌장인 리위안차오가 중앙조직부장으로 선임됐다. 과거 공청단에서 함께 일한 경험이 있는 두사람이 한명은 중앙조직부장으로, 한명은 중앙조직부 상무부부장으로 다시 만나게 된 것. 이미 코드가 맞는 두 사람은 후진타오 주석과 함께 공산당의 인사권을 장악했으며 이 과정에서 상당한 당내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됐다.

그는 또한 공직에 몸을 담고 있는 과정에서 꾸준히 학업에 손을 놓지 않았다. 이 역시 그의 고속승진에 밑거름이 됐다. 그는 1990년부터 1년동안 중앙당교 간부훈련반에서 학습했고, 동시에 1990년부터 2년동안 중앙당교 통신교육대학 경제관리를 전공했다. 이어 1995년부터 3년간 중앙당교 경제관리전공 대학원생반에서 학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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