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시대 핵심100인]<23>궈진룽 – 후진타오 신뢰 업고 베이징 입성하다

2011-06-15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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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조용성 특파원) 관료로서 베이징(北京) 시장은 ‘천지인’의 이점을 지니고 있다고들 한다. 우선 베이징이 세계의 기운이 모이고 있는 중국의 수도라는 점에서 천기에 통해 있고, 지리적으로 중국 최고의 의사결정기관인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9명 멤버들과 같은 대지를 밟고 살기 때문에 그들과 호흡을 같이하며 신뢰관계를 쌓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또한 베이징에 최고위 관료들은 물론 지방정부의 지도자들 역시 수시로 베이징을 방문하기 때문에 인적 네트워크에도 이점이 있다.

때문에 그동안 베이징 시장들의 출세길은 상당히 전도유망해왔다. 자칭린(價慶林) 정치협상회의 주석은 1996년부터 1999년까지 베이징시장을 역임한 후 2002년까지 베이징 서기를 거쳐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했다. 또한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베이징 서기를 역임했던 웨이젠싱(尉健行)은 이후 상무위원직인 중앙기율검사위 서기까지 올라갔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베이징 시장을 지낸 왕치산(王岐山) 부총리는 정치국위원에 올라섰으며 내년도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할 유력한 후보다. 1999년 베이징 시장에 오른 후 2003년부터 베이징시 서기를 맡고 있는 류치(劉淇) 역시 정치국위원 반열에 올라있다.
이처럼 베이징시장을 거친 인사들은 대체로 관운이 좋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권력의 심장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불행한 일을 겪는 경우도 종종 있다. 1983년 베이징 시장에 올라 10여년 시장직을 역임하다 1992년 베이징시 서기에 올랐던 천시퉁(陳希同)은 베이징방의 대표주자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었다. 그는 덩샤오핑(鄧小平)의 신임아래 장쩌민(江澤民) 당시 총서기와 대립각을 세웠었고, 이는 자신을 파멸의 늪으로 밀어넣는 작용을 했다. 그는 1995년 공직에서 사임했으며 1997년 횡령과 부패혐의로 공산당에서 제명되는 불운을 겪는다.

마오쩌둥(毛澤東)이 “바늘이 들어갈수도 물이 스며들 수도 없는 곳(針揷不進,水潑不進)”이라고 평했던 베이징에서 서기직을 행하고 있던 펑전(彭眞)은 문화대혁명 당시 반당그룹의 주모자로 몰려 옥고를 치렀다. 2003년 1월 베이징시장에 취임했던 멍쉐눙(孟學農)은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깊은 신뢰를 받고 있었지만 당시 사스(중증호흡기질환, SARS)가 베이징을 덮치자 3개월만에 시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베이징시장직은 상당히 민감하며 처신에 극도로 신경을 기울여야 하는 직책으로 볼 수 있다.

현재 베이징 시장인 궈진룽(郭金龍) 역시 마찬가지 입장이다. 그의 정치적 업적은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알려지지만, 그의 사소한 실수 역시 노출이 쉽게 된다. 때문에 궈진룽은 말을 자제하며 상당히 진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직까지 궈진룽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좋은 편이다. 또한 후진타오 주석의 신임을 받고 있는 만큼 차기 베이징 서기 후보 1순위로 거론되고 있다. 베이징시 서기로 승진한다면 그의 공산당내 직위는 정치국위원으로 올라설게 유력시되고 있다.

◆위미즈샹(魚米之鄕), 톈푸즈궈(天府之國)

1947년 장쑤(江蘇)성 난징(南京)에서 출생한 궈진룽은 난징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궈진룽은 스스로를 위미즈샹(魚米之鄕, 물고기와 쌀의 고향이라고 할 정도로 풍족하다) 장쑤성에서 태어나 톈푸즈궈(天府之國, 땅이 기름져 하늘의 곳간이라고 불리다)인 쓰촨(四川)성에서 자랐다고 말하고 있다.

1969년 난징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궈진룽은 쓰촨성 중(忠)현에 배치된다. 중현은 현재 충칭(重慶)시에 속해 있다. 그는 중현에서 16년을 일한다. 그의 첫 직장은 중현의 수력발전국이었다. 그는 그 곳에서 조끼를 입고 전신주를 올라 전선을 연결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4년여를 기층 노동자 생활을 한 궈진룽은 1973년 중현 체육위원회 코치로 발탁된다. 난징대학의 배구팀 주축선수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물리학 전공자인 궈진룽은 뜻밖의 직업을 갖게 된 것. 중현에서 그가 양성한 선수중에는 중국 남자배구 국가대표 코치인 저우젠안(周建安)도 포함돼 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궈진룽은 중현에서 배구, 농구, 바둑 등 일부 종목별 경기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스포츠조직을 결성했다. 그러던 그가 그 자신이 30여년 이후 올림픽의 조직위원회의 집행의장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후 현 위원 회의 홍보부에서 1년간 직무를 맡은 후에, 1980년 궈진룽은 중현의 문화교육국의 부국장이 됐고, 이듬해 문화국 국장자리에 올라서게 된다.

1983년 궈진룽은 중현에 배치받은지 14년만에 현장에 오르게 된다. 그러던 1985년 중현은 쓰촨의 제3번째 체제개혁 시범지역이 되고, 궈진룽은 현 회의에서 자신의 개혁개방에 대한 의견을 발표하게 됐다. 당시 회의에는 쓰촨성 농업연구실 주임인 리부윈(李步雲)이 참석해 있었고, 그는 궈진룽을 눈여겨보게 됐다. 리부윈은 당시 쓰촨성 서기 양루다이(楊汝岱)에게 궈진룽을 천거했으며, 양 서기는 그를 쓰촨성 농업연구실 부주임으로 발탁하게 된다. 이때부터 궈진룽의 관료인생은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이후 궈진룽은 1987년 쓰촨성 러산(樂山)시 부서기로 이동됐고, 1990년에 시 서기로 올라섰다. 1992년 덩샤오핑(鄧小平)의 남순강화로 중국 전체는 개혁개방 열기에 휩싸였고, 궈진룽은 이 바람을 타고 쓰촨성 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임되면서 지도층에 진입했다. 이듬해인 1993년 4월에는 쓰촨성 부서기로 승진됐다.

◆티베트에서 도시화 박차

8개월 후 그는 쓰촨성에서 벗어나 티베트자치구 부서기로 전임돼, 후진타오 주석의 비서를 역임했던 천쿠이위안(陳奎元) 서기와 손발을 맞추기 시작한다. 그는 이 곳에서 11년을 근무한다. 후주석 역시 티베트에서 근무한 바가 있었고, 티베트에는 후주석과 가까운 인사들이 여럿 포진해 있었다. 이들과의 인연으로 인해 그는 후진타오 주석의 눈에 들게 된다. 이는 훗날 그가 베이징시장에 오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94년 궈진룽은 티베트 자치구 상무 부서기에 올랐고 이후 6년 후인 2000년 궈진룽은 티베트 서기에 올라섰다. 취임초기 그는 정책의 안정성과 연속성을 강조해 경제의 안정적인 발전을 유지하는 데 주력했다. 또한 그의 임기중에 칭짱(靑藏)고속철도가 공사를 시작했다.

궈진룽은 중앙과 내륙지방 각 성으로부터 지원을 얻어내 티베트의 도시화에 박차를 가했고, 그의 임기 중 연 평균 경제 성장률 12%를 달성했다. 2002년 후진타오 국가주석,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를 필두로 한 새로운 지도부가 들어서자 그는 티베트에 더욱 많은 자본이 투입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가 스포츠를 좋아하고, 호금(중국의 고전악기)을 연주할 수 있으며 바둑실력이 수준급(3단으로 알려져 있음)이었던 점은 티베트문화와 잘 어우러졌다. 그는 티베트인과의 관계가 상당히 우호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그의 말은 간결하고 깔끔했으며 특별한 공식대회가 아니면 즉흥발언으로 간결히 끝맺음했다고 한다. 



◆안후이를 창장삼각주에 융화시키다

2004년12월 궈진룽은 안후이(安徽)성 서기로 옮겨간다. 전임하자마자 그는 안후이의 17개의 시를 두루 돌아보는 것으로 첫 업무를 시작했다. 궈진룽이 안후이성에서의 3년임기동안 때마침 중앙은 “중부궐기”를 제창했다. 궈진룽은 공업강성의 전략을 내세웠다.

궈진룽이 서기를 맡을 때 안후이성은 아직 왕화이중(王懷忠, 안후이성 부성장을 역임하다 비리혐의로 2004년 사형당함)의 충격과 분유업체인 다터우와와(大頭娃娃)의 가짜 분유의 충격에 빠져 있었다.

당시 인터넷에서는 “안후이에서 금산(金山, 당시 안휘성장의 이름)이 있는데 금룡(金龍)이 왔다. 이 둘이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면 다음에는 차라리 벽돌을 불러야겠다”라는 냉소가 나돌았다. 하지만 냉소를 뒤로한 채 궈진룽은 냉정하게 일을 추진해나갔으며,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중앙조직부의 상무 부부장 선웨웨(沈躍躍)는 훗날 베이징시 지도자에게 궈진룽을 소개할 때 “당의 사무와 경제 작업을 잘 알고 있으며 지도자 경험이 풍부하고 에너지가 넘친다. 대국을 볼 줄 알며 복잡한 문제를 풀어내는 해결능력이 있다”고 평했다.

안후이성의 한 시장(市長)은 또한 “궈진룽은 안후이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왔다. 동부지역 발전전략을 이식해와 안후이가 적극적으로 창장 삼각주 경제권에 융합되게 했다”며 “이는 안후이의 화려한 변신이었다”고 평했다.

◆베이징의 교통난과 집값급등

궈진룽은 2007년 왕치산의 후임으로 베이징시장을 맡았다. 궈진룽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잘 치러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을 뿐 아니라 인구, 환경, 자원, 집값 등의 고질적인 베이징의 병폐들을 떠안았다.

베이징올림픽까지 200일을 채 남겨두지 않은 상태에서 베이징 시장을 맡았지만 막 회갑을 가득 채운 궈진룽은 단연 스폿라이트를 받았다. 그는 취임초기 “올림픽 기간에 나타날 수 있는 물가급등을 방지하고, 집값상승을 억제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다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궈진룽은 베이징시의 교통난을 해소하기 위해 2010년 12월 교통대책을 쏟아냈다. 우선 2011년 신규 차량 등록을 지난해의 1/3수준인 24만 대로 제한했으며, 출퇴근 시간대 5환(環)이내 도심에 외지 차량의 진입을 금지하기도 했다. 주차비도 시간당 최고 10위안으로 인상했으며, 일부 번화가는 시간이 아닌 15분당 주차료를 부과토록 했다. 이 같은 대책이 시행된 지 4개월만에 베이징의 교통혼잡도 지수는 16% 줄어드는 효과를 냈다.

또한 궈진룽은 지난 2월 부동산가격 급등을 막기 위해 경15조(京15條)를 발표했다. 이로 인해 베이징 호적이 없는 외지인은 5년 이상 세금과 사회보험료를 납부한 경우에만 주택 한 채를 살 수 있게 됐으며 이 대책의 영향으로 베이징의 부동산 수요는 급감했고 집값급등세도 한풀 꺾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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