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우리의 중국부자들> 형동생 콤비경영 눈길

2011-06-13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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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연예계의 큰손 왕중쥔 회장





(아주경제 홍우리 기자) 중국 최대의 영화제작사이자 엔터테인먼트사 화이브라더스(華誼兄弟傳媒集團, Huayi Bros. Media Group)의 왕중쥔(王中軍) 회장의 유년시절은 화려한 연예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1960년, 왕중쥔은 베이징의 군인가정에서 태어났다. 야전부대 대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수도없이 여기저기로 옮겨다녔고, 76년에는 17세의 나이로 군에 입대한다.

이후 국가물자총국 물자출판사와 광고회사 등에서 미술디자인, 사진기자를 담당했던 그는 1989년 홀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하루 중 15시간씩 일과 학업에 몰두했던 고달픈 유학생활의 목적은 오로지 ‘학위’와 ‘돈’이었다. 왕중쥔은 음식 배달 등을 하며 한푼 두푼 모은 10만 달러와 뉴욕주립대학 매스미디어 석사학위를 들고 94년 귀국, 동생 왕중레이(王中磊)와 함께 광고회사인 화이브라더스를 설립한다.

말이 좋아 광고회사였지 화이의 첫 시작은 소잡지 발행에 불과했다. 잡지에 광고 몇 개를 실어 대사관과 고급 아파트에 무료로 배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은행에서 전국 1만 5000개 지점망 표준화 관리에 필요한 로고 및 이미지 통합(CI)을 화이에 맡겼고 국가전력, 시노펙 등도 잇따라 화이의 문을 두드렸다.

국유 대형기업의 프로포즈로 화이는 자금과 명성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중국 십대 광고회사 반열에 올랐다.

1998년, 길을 지나던 왕중쥔은 우연히 유학 전 몸 담았던 광고회사의 동료와 재회하게 되고 그를 통해 TV 드라마 제작과 수익성에 대해 듣게 된다.

왕 회장은 이 때부터 드라마 제작 및 투자에 관심을 갖기 시작, 그의 첫 작품 <심리병원(心理診所)>을 세상에 내놓는다. 프로그램 제작 경험은 없었지만 왕중쥔은 광고계에서 쌓은 노하우로 대대적인 홍보를 함으로써 100% 이상의 수익을 거둔다.

드라마 제작으로 ‘단맛’을 본 왕중쥔은 곧 영화 투자에도 뛰어든다. 그는 총 세편의 영화에 투자했지만 펑샤오강(馮小剛)의 영화 <몰완몰료(沒完沒了)>에서만 재미를 봤다. “펑샤오강이 없었다면 화이는 두번 다시 영화에 투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는 농담처럼 이야기하곤 한다.

‘대규모 제작’은 왕중쥔의 최고 성공 비결이다. 영화 기획에서부터 제작, 이후의 홍보, 상영에까지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으며 제작한 영화마다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또한 <거장의 장례식(大腕)>으로 중국 영화 최초로 해외 극장 상영에도 성공하며 중국 최대의 영화 제작사로 발돋음 했다.

동생 왕중레이와의 철저한 업무 분담은 화이브라더스의 또 다른 성공전략이다. 왕중쥔은 화이브라더스의 회장으로서 회사의 중대사안을 결정하며 왕중레이는 상사의 결정을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
혈연 관계를 떠나 정확한 일 처리에 화이브라더스의 이사회도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왕중쥔은 연예인 배출에까지 발을 들이고 2000년 화이브라더스 매니지먼트사를 설립한다. 현재 리빙빙(李氷氷), 덩차오(邓超) 등 수십 명의 톱 스타급 연예인이 화이브라더스에 소속되어 있으며 최근에는 HOT의 장우혁과 계약을 맺기도 했다.

화이브라더스는 2009년 10월 매니지먼트사 최초로 차스닥 시장에 상장했으며, 왕중쥔과 왕중레이는 자산 합계 32억위안(한화 약 5360억원)으로 후룬에 의해 차스닥 최고 부호로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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