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엽 선생의 타개에 대해 한 노학자는 이렇게 비통한 심경을 토해냈다.
중국 베이징 현지에서 김준엽 선생님이 타개하셨다는 비보를 접한 필자는 실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슬픔에 잠겼다.
필자는 영광스럽게도 선생님께서 일절 인터뷰를 사양하시던 지난해 6월 마지막으로 떼를 써서 인터뷰(서면)를 했었다. 아주경제 협력사인 중국 인민화보사(人民畵報社)의 월간 《중국》잡지 6월호에 ‘한·중 관계를 빛낸 인물’로 선생님을 모시려던 참이었다.
한국 최고의 중국통을 모시고 한중 20년 기념행사를 치른다는 설레임은 이제 통한의 그리움으로 남게 됐다.
선생님을 형용하는 말은 끝도없을 것이다. 어느 노학자의 말처럼 한반도 최고의 진정한 중국통이셨으며 한중 관계의 중요성을 실천적으로 인식하고 연구에 몸바친 분이셨다.
선생님은 중국 대학자인 계선림(季羨林)선생과도 교유할 정도로 심원한 학문의 세계를 가졌다.
김준엽 선생님의 제자인 베이징대 양통방 교수를 비롯한 중국의 젊은 학자들은 선생님을 '지조있는 선비요 위대한 독립군'으로 기억하고 있다.
특히 선비의 절개와 지조를 거론하면 선생님을 그냥 지나치기 힘들다.
'지조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고귀한 투쟁이다' 시인 조지훈이 얘기한 지조론의 이 대목은 마치 선생님을 위해 예비해 둔 시어처럼 들린다.
선생님은 중국에서도 존경받는 위대한 독립군이셨다.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었다가 탈출하신 선생님은, 6000리 대장정(大長征) 끝에 독립군에 합류한 후 특수 공작훈련을 받았다. 선생님은 평생 독립군의 자세로 정의롭고 올 곧게 사셨다.
광복 후 선생님은 현지에 남아 학업에 정진하셨다. 1949년 귀국 후 고려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후에는 정치권의 강권을 물리치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셨다. 선생님은 고려대학 총장때도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편에 서서 군사정권과 정면으로 대항했다.
선생님께서 권력에 대항하다 총장직을 사퇴하실 때 우리는‘총장 사퇴 결사 반대’를 외치며 한달간 시위를 벌였다. 선생님은 당시 우리들의 이런 행동을 최고의 훈장으로 가슴에 새기고 정든 캠퍼스를 떠나셨다.
또한 선생님은 한중관계사(韓中關係史)를 재정립하는데 헌신하신 우호사자(友好使者)이다. 평생 중국학에 정진하셨고 1988년 다시 중국을 찾은 이래 매년 10여회 중국 전역의 한·중 관계 상징물을 복원하고 기념비를 세우는데 심혈을 쏟으셨다.
베이징(北京)대학과 저장(浙江)대학 등 중국 내 8대 명문 대학에 한국학연구소를 개설한 것도 선생님의 족적이다. 20년전 난징대학 제자 등 중국 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선생님의 그같은 일들을 도왔다. 이런 공로가 인정돼 2000년 7월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중국정부로부터 문화훈장(中國語言文化友誼章)을 수상하였다.
선생님은 평소 "의로움을 잃지 말고 고매한 인격으로 나라의 참된 일꾼이 되라"고 가르치셨다. 작은 이해와 권력에 휘둘리지 말고‘역사에 살라’고 강조하신 고인께서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스승이다.
베이징 서재에서 서해 넘어 바라보니 나라는 어지럽고 한·중 관계의 앞날도 아직 아득한데 이제 누구에게 지혜를 구하고, 누구에게 가르침을 얻는다는 말인가. 생각할수록 비통함이 가슴속을 저며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