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금메달리스트 김연아(21·고려대)는 이미 세계선수권대회와 그랑프리 시리즈를 제패하며 금메달 후보로 꼽혔고,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 정상에 오른 이상화(22·서울시청)도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때 5위에 오르며 ‘될성부른 떡잎’으로 불렸다.
그러나 밴쿠버올림픽을 앞두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모태범과 막연한 기대주에 머물렀던 이승훈은 각각 남자 500m와 10,000m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따내며 스타 반열에 올랐다.
그로부터 1년이 흘러 둘은 한 시즌을 더 보냈다.
이승훈은 동계아시안게임에서 3관왕에 올랐지만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처음으로 함께 레이스에 나선 선수에게 지는 경험을 했고, 모태범은 부상에 발목이 잡혀 기대만큼 성적을 내지 못했다.
28일 올림픽공원에서 만난 이승훈과 모태범은 “아쉬움이 남지만 좋은 경험을 했다”고 한 시즌을 돌아봤다.
올해 2월 한국체대를 졸업하고 나란히 대한항공 빙속팀에 들어간 둘은 “최고의 환경에서 운동하고 있다”면서 “훈련 방식에 변화를 줘서 지난 시즌의 아쉬움을 털어버리겠다”는 각오를 함께 전했다.
2010-2011시즌을 마치고 휴식기를 보내고 있는 이승훈과 모태범은 4월 하순부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게 부여되는 병역특례 혜택에 따른 4주간의 군사훈련을 받고서 본격적으로 새 시즌을 준비할 계획이다.
다음은 문답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한 시즌을 마친 소감은.
△이승훈= 올림픽이 열렸던 시즌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둬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 10,000m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4위)을 거둔 것은 아쉽다. 피로가 쌓여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좋은 경험이 됐다. 앞으로 준비하는 데 큰 공부가 될 것 같다.
△모태범= 지금까지 운동하면서 다쳐 본 일이 없는데 처음으로 부상을 겪은 시즌이었다. 시즌을 시작하기 전 컨디션은 좋았다. 첫 대회였던 1차 월드컵에서 정말 몸이 좋았기에 기대가 컸는데, 그만큼 마음이 앞섰던 것 같다. 그래서 너무 과감하게 타다가 아킬레스건이 찢어지고 말았다.
--아쉬운 만큼 배운 것도 많았을 것 같다.
△이승훈= 세계선수권대회 10,000m에서 밥 데용(네덜란드)에게 졌다. 경기에서 누군가에게 진 것은 처음이었다. 레이스를 하면서 예전과 다른 느낌을 받았다. 같이 뛰는 선수가 점점 멀어지면서 ‘어, 이상하다’ 싶더라. 몸은 여유가 있었는데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았다. 정신이 흐트러지면서 육체적으로도 페이스가 무너졌다. 뒤지더라도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금메달을 따도 좋은 게 있었겠지만, 이번에 느낀 것을 훨씬 늦게 깨달았을 거다. 일찍 배워서 잘됐다고 생각한다.
△모태범= 정말 자신감 넘치게 시작한 시즌이었다. 스케이트 타는 게 너무 재미있었고, 그래서 욕심도 많았다. 누구와 함께 타더라도 원하는 경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너무 과감히 나섰던 게 부상으로 이어졌다. 다시는 이런 느낌을 받고 싶지 않다. 경기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몸을 잘 지키는 게 최고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이승훈 선수는 쇼트트랙 훈련을 하고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에 나서는 것으로 유명하다. 어떤 장점이 있나.
△이승훈= 쇼트트랙은 상대적으로 작은 코너를 돌아야 하기 때문에 원심력을 견디며 속도를 내는 방법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된다. 쇼트트랙 훈련을 하고 나서 스피드스케이팅 코스에서 코너를 돌면 확실히 훨씬 편하다. 대신 직선 주로에서 속도를 내는 것은 부족한 편이다. 올해는 훈련 방식을 바꾸는 것도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쇼트트랙은 내 강점이니 그대로 유지해야겠지만, 한편으로는 약점도 보완해야 한다. 웨이트트레이닝을 많이 해서 힘을 키우는 데도 신경을 쓰려 한다.
--모태범 선수는 원래 중거리를 더 많이 뛰었는데, 올 시즌에는 500m를 위주로 경기에 나갔다. 단거리에 집중할 생각인가.
△모태범= 올 시즌 국제대회에 딱 세 번 나갔다. 몸을 다치다 보니 1,500m를 제대로 뛰지 못했고, 기준기록을 통과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다 보니 유독 단거리만 타게 됐다. 하지만 500m에만 집중할 생각은 없다. 다음 시즌에는 다시 중거리에서도 실력을 발휘하고 싶다.
--이승훈 선수처럼 훈련 방식을 바꿀 계획이 있나.
△모태범= 나도 새 시즌을 앞두고는 변화를 주고 싶다. 무엇보다도 더 힘들게 훈련할 생각이다. 지난 시즌까지 내 훈련은 힘든 것도 아니었다. 훈련 강도를 높이고, 몸무게도 줄이는 등 변화를 시도할 생각이다. 그래서 올해 느낀 아쉬움을 털어버리고 싶다.
--한국체대를 졸업하고 나란히 대한항공에 입단했다.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로는 처음으로 기업 팀에 입단하기까지 망설임은 없었나.
△이승훈=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대기업에서 팀을 운영하는 만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대한항공에서는 정말 대단하게 지원해준다. 적극적으로 미리 준비도 많이 해 주시고, 원하는 것도 바로 지원해 주신다.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잘하는 일만 남았다.
△모태범= 이만큼 지원해줄 수 있는 곳이 대한항공밖에 없기에 선택했다.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회사에서 워낙 부족함 없이 지원해 주다 보니 환경은 좋아졌는데, 그만큼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게 된다.
--팀에 선수가 둘뿐이다. 서로 의지가 되나.
△이승훈= 큰 도움이 된다. 단거리와 중거리를 뛰는 태범이는 폭발적인 힘이 강점이다. 나는 지구력은 있지만 순간 스피드가 부족하다. 태범이 뒤를 쫓아 타면서 그런 점을 익힌다. 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때가 잦다. 태범이도 내게 수시로 코너 도는 방법을 물어보곤 한다. 서로 종목이 다르기에 더 의지할 수 있다. 같은 종목이라면 서로 경쟁심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아서 거리낌 없이 서로 노하우를 주고받을 수 있다.
△모태범= 같은 종목 라이벌이었다면 이렇게 친해질 수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를 주고받곤 한다. 종목이 달라 더 친해진 것 같다. 내가 경기가 안 풀릴 때면 승훈이에게 투덜거리고, 승훈이도 잘 안 되는 게 있으면 내게 고민을 이야기하곤 한다. 주로 내가 투덜거릴 때가 많다. 보통 내가 악역이다. (웃음)
--새 시즌에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나.
△이승훈= 이제 스피드스케이터로서 겨우 두 시즌을 탔으니, 나는 아직 아기나 마찬가지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 맞춰 배워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올해보다 더 좋은 성적을 내는 게 목표다.
△모태범= 이번 시즌 목표는 무조건 ‘다치치 말자’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 철저히 준비할 것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