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뻬이성 바오딩시는 중국 현대사에 있어 굵직 굵직한 역사의 궤적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였다. 바오딩은 1960년대 초 중반 중소및 중미 등 대외관계와 중국의 내부상황, 당시 마오쩌둥의 정세인식과 문화 대혁명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도시중 한 곳이었다.
“지난 1966년 마오 주석은 미국의 침략 가능성에 큰 두려움을 느꼈지요. 거기다 소련과의 관계도 매우 나빴죠. 마오 주석은 전쟁과 식량확보에 전력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공산당 허뻬이성 위원회는 텐진(天津)에 있던 허뻬이성 성도(성의 수도)를 내륙 바오딩으로 옮기기로 결정했어요.”
“어떤 연유에서죠?”
“텐진은 연해 도시라서 미국이 침략할 경우 첫 공격 타깃이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지요. 성 수도를 바오딩으로 옮기면 내륙이어서 안전하고, 농촌이라서 식량확보가 쉬워 일거양득이라는 판단에 따른 겁니다. 이렇게 해서 성도가 바오딩으로 왔는데 바오딩은 채 두해도 안되 또다시 성 수도의 자리를 내줘야 했지요.”
“또, 무슨 곡절이 있었나요?”
이번에는 웨이교수가 끼어들어 한달음에 나의 궁금증을 시원스럽게 풀어줬다.
“문화대혁명의 혼란스런 기운이 허뻬이를 휘감고 소용돌이 칠때 였습니다. 1966년 중반 허뻬이성 정부가 무정부상태에 빠진 적이 있어요. 1968년 베이징군구가 허뻬이성을 접수하고 회의를 열었지요. 이 회의는 스좌좡(石家庄)이 혁명의 선봉도시로서 노동자 계급의 대오가 훨씬 강건한 곳이라며 성 수도를 이곳으로 옮길 것을 결의했지요.”
한마디로 바오딩은 봉건적이고 전근대적 구습에 젖은 (장개석의)도시로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한다는 혁명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어렵다는 이유로 졸지에 성도의 자리를 뺐기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얘기와 맛있는 바이쥬(고량주)에 취해 나는 이날 저녁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래도 다음날 아침 예정대로 6시에 일어나 갈 길을 재촉했다. 딩저우(定州)로 이어지고 다시 스쟈좡으로 뻗어 내려간 107번 국도를 따라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성도인 스좌좡은 부산한 상가나 거리표정으로 볼 때 제법 경제활동에 활기가 느껴졌다.
스쟈좡 서쪽에는 거대한 타이항(太行)산맥이 병풍처럼 버티고 서있다. 산시(山西)는 바로 이 타이항산의 서쪽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대도 높고해서 산시성 양취안(陽泉)이라는 곳까지는 기차를 이용하기로 하고 역에 나갔더니 노동절 연휴라서 역광장은 몹시 혼잡했다.
“작은 차를 하나 임대해서 출발하는게 어떨까요?”
나의 제안에 웨이교수는 “기다려 보라”고 말한 뒤 기차표 판매소쪽으로 달려갔다.
한시간쯤 후 웨이교수가 땀이 범벅이 됐으나 웃는 낮으로 달려와 “먼저 저쪽 플랫폼에서 자전거 부터 투오윈(托運 짐을 부침)하자”고 말했다.
그는 용케도 입석표 두장과 좌석표 한 장을 구해왔다. 하지만 여행이 꾀나 힘들었던지 그의 손에 들려있는 표는 양취안에서도 한참을 더 지나 산시성의 성도 타이위안(太源)에 이르는 표였다.
“일단 타이위안 표를 구입했지만 체력이 회복되면 도중에 내리면 되지요” 웨이교수가 지쳐보이는 모습에 다소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