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경의 트렌드브리핑] 행복한 봄 기운

2011-03-18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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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너무 지겹고 우울해서인지 봄 기운이 감도는 날씨에 의식 깊은 곳이 가뭇해지면서 나른한 행복감이 밀려 든다. 겨울이라고 행복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봄이라서 더 행복한 기분이 가슴 깊숙히 스며든다고 인정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봄이라서 더 행복하다. 아주 아주 많이 행복하다. 행복의 절정은 이 봄날의 나른한 날씨만이 보장할 수 있을 듯 싶다. 길고 고통스러운 기억의 편린을 남긴 겨울이여, 제발 빨리 가라. 사라져라.

괜히 포털 사이트에서 '날씨'를 검색해본다. 꽃샘추윈지 뭔지 추위의 불시 기습에 대한 의심을 박멸하고 싶어서다.

"기온이 쑥쑥 올라가고 있습니다. 어제(10일) 점심 무렵만 해도 서울의 기온은 2~3도 선이었는데요, 지금은 7도 안팎까지 올라있습니다. 주말까지 맑고 포근한 날씨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이 되는데요. 일요일 쯤에는 서울의 낮 기온이 15도 안팎까지 상승하겠고요, 주말 내내 나들이하기에 좋은 날씨가 되겠습니다."

어느 방송인지 기상 케스터의 조잘조잘 입살이 웬일인지 얄밉지가 않다. '어쩔시구, 홍헤야! 에헤에헤…'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듯 속이 시원해진다. 날씨가 따듯해진다니. 15도 안팎이라니. 딱딱하게 굳었던 뒷골과 경동맥이 살살 풀리는 것 같다. 심장의 뜀박질도 좀 느려지는 것 같다. 느긋한 기분이 든다. 왜 아니랴. 더위에 슬슬 이완되는 철길처럼 인간의 핏줄도 따스한 햇빛에 살살 풀리는 이치가 당연하겠지. 평소 쪼르르 쪼르르 힘겹게 흐르던 혈액도 소리도 경쾌하게 졸졸졸 잘 흐르겠지. 사람의 기분도 붕 뜨겠지.

너무 기분이 좋다. 오늘이야 말로 한 잔 하고픈 날이다. 내일부터는 차도 놓고 다니고 가까운 길일랑 걸어서도 가고 싶고 그런 날들일 것이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카카오톡 뒤에 숨어서 성의 없는 문자질이나 해대던 나날이 조금 민망해진다. 오랜만에 손가락 부러지지 않은 걸 증명해주려니 낯이 붉어진다. 그래도, 그럴망정 전화기를 돌려본다. 띠띠띠… 잠깐, '술값은 100% 먼저 전화한 사람 차지다'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친다. 머릿속 계산기가 빠르게 굴러간다. '마나 써야지? 카드 아직 괜찮지?' '지갑은 들고 왔지?' 가슴과 엉덩이께를 훓는 드라이한 손길이 분주하다. 3초 후. "무슨 술값을 각자 내냐? 내가 살께. 걱정말고 모이기나 해. 거 왜 걔, 오랜만에 보니까 꼭 나오라 그래. 그럼 2차도 쏘냐고? 아니 그건 그때 가서…그래 그래" 아차차, 내가 지금 무슨 망언을 뱉고 있지? 자각한 순간 수화기는 이미 뚝, 끊겼다.

어, 이런…! 입맛을 쩝 다셔본들 업지러진 물을 주워담을 순 없다. 한잔 사며 어깨를 으쓱, 품위를 세웠을 때 실익이 뭔지 어쩌구 따져본들 부질없다. 아침에 후회한 날들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진다. 그래서 다시 한번 쩝, 입맛을 다신다. 별 수 없다.

아무튼 오늘 한잔 하는 날이다. 지금부터 즐거운 기분에 빠져야 한다. 룰루랄라, 흥이 나야 한다. 아싸라비아, 노래방에서 무슨 노랠 부를까 곡목을 미리 궁리해 놓아야 한다. 머리에 허리띠를 두를까, 넥타이를 두를까 연출도 기획해 놓아야 한다. 2차, 3차 차수 변경 때 어디로 유도해서 누구한테 몰아줄까, 뭐 그런 것까지 시나리오 플래닝해 놓는다면 그는 선수다. 인사말부터 첫마디, 건배사, 재치있는 농담, 치고 빠지며 술잔 돌리는 순서, 농담 속의 뼈와 웃음 포인트까지 차곡차곡 쟁여놓는다면 그는 고수다.

물론 선수, 고수라고 자칭하는 친구들은 널렸다. 하지만 자기 빼고는 다들 그저 허풍일 따름이다. 어디까지나 진정한 고수는 나, 바로 나 자신뿐이다. 코 평수가 넓어지고 허파가 벌렁거리며 째지는 기분이 쑤욱 목구멍을 타고 넘어갈 때 쯤 술값에 대한 걱정 근심은 어느덧 사라지고 평화로운 기분이 몰려 온다. 상상력은 마약이다.

어서 와라, 퇴근이여. 나 오늘 망가지리라. 이 좋은 봄날, 행복한 봄 기운을 마음껏 흠향하며 심히 망가져 주리라. 히잉휘잉 콧바람 휘파람이 제 멋대로 나온다. "무슨 기분 좋은 일 있으세요?" 여직원이 하얀 미소를 퍼뜨리며 싱그럽게 묻는다. "봄이잖아. 봄! 봄엔 왈츠도 춘다던데 우리는 노래방이라도 가야지 않겠어?" 벌렁거리는 심장이 대답한다. "네? 봄? 노래방이요?" 백치 아다다 같은 표정을 짓는 그녀가 뒷통수께를 오래 쳐다보거나 말거나, 흥을 깰 수는 없다. 봄이다 봄! 트렌드가 개구리처럼 튀어나와 통통거릴 채비를 차리는 행복한 봄이다.

[트렌드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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