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놓고 저지르는 절도범죄가 아니라 은근히 쓰리쿠션으로 하는 도둑질. 있는 힘껏 하면 뭔가 완성할 수 있지만 괜히 앓는 척하며 흐지부지 만드는 짓.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면서 애꿎은 세월만 죽이는 행태. 자기가 모른다고 아예 그런 사실이나 사물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 권리는 주장하되 책임이 동전의 앞 뒷면이라는 사실을 모르쇠 하는 미필적 고의의 딴청. 공중도덕, 공공의 안녕과 복지야 어떻건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아무 짓도 안하며 놀멘 놀멘하는 놀부 심보.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납작 업드려 허리만 굽신 굽신, 눈알은 번들번들 반역의 뜻을 품고 사는 삶. 그러고도 입만 나불대지 정작 아무런 실천도 하지 않는 삶. 남의 돈을 내 돈처럼 아낌없이 펑펑쓰다 펑크날 때쯤 뒤로 쑥 빠져 관망하다가 잠잠해질 때쯤 자라목을 길게 빼고 ‘무슨 일이 있었나?’ 눈만 끔벅거리는 징그러운 능청. 남들 다 한다는 핑계로 아무렇지도 않게 기초질서 위반하고, 남의 자식 사교육 욕하면서 자기자식 특수 사교육 시키는 이율배반. 네가 하는 일이라 나는 무조건 반대다 핏대 올리고, 남 눈의 티끌은 날카롭게 집어 내되 제 눈의 들보는 있을 리 없다, 게거품 무는 적반하장. 돈 빌려가서 기한 지났는데도 남의 애간장, 복장 다 태워놓고 ‘내가 뭐랬어?’ 눈만 끔벅끔벅하는 여우 짓. 이런 게 모두 ‘벼락 맞을’ 모럴해저드의 실상이다.
대한민국은 모럴해저드 공화국이다. 재앙, 재앙 하는 판국에 어차피 나오는 정부 보상금 바라고 후딱 소·돼지 살처분에 나선 축산업자가 있을 정도다.
입으로는 정의와 평화를 부르짖지만 삶에서는 기회주의, 피해 입는 거 딱 싫어하는 진보파도 있다. 남 덕에 한 평생 부자로 잘 먹고 잘 살아놓고도 쯧쯧 혀나 차며 피한, 피서 여행이나 다니는 보수파도 있다.
그들의 악착같은 성공 스토리에 흥분하며 욕해놓고 자식한테는 “사람이 너무 착하면 바보 취급 당해” 강요하는 부모들도 널렸다. 돈 못번다, 세금 많다, 정부 탓이다 입만 열면 주절대면서도 꼬박 꼬박 제철 음식 찾아 먹는 서민들도 부지기수다. 젊은 시절 온갖 간난신고 다 겪으며 키워온 종교적 성취를 오롯이 자기의 공으로만 돌려 사유화시키려는 종교지도자도 드물지만 있다. 엉터리 번역에 짜맞추기 편집, 원작의 융숭한 뜻이 모두 상실된 어린이 명작선을 태연하게 출판해서 통장이나 만지작거리는 출판업자들도 지천이다. 고연봉자 적체현상에 적자행진을 계속하면서도 손 하나 안대고 코풀며 호의호식하는 복마전 미디어 업계 화상들도 여전히 건재하다. “나는 기관인데, 너는 우수마발 아니냐? 네 돈이 내 돈이고 내 돈은 우리 패밀리 돈이다” 백주 대낮에 합법적 금융사기를 해먹는 저축은행도 정권을 넘나들며 입을 쩍쩍 벌린다. 구린 입에 마스크도 안 쓴 채 ‘나는 받을 생각이 이제는 없어진 돈을 저 사람이 줬다고 우긴다’ 주장하며 지루하게 재판 중인 전·현직 고위직들도 많다. 지역 유지들도, 그 유지들에게 딴지거는 빈대들도 모두 자기 수중에 떨어지는 구전과 떡고물에 눈이 멀어 인지상정을 짓밟는다.
거짓말, 무고, 위증, 명예훼손 등 범죄급 모럴해저드도 백주 대낮에 전국 방방곡곡, 전 계층의 마음 속에 지천이다. 이런 것들에 비하면 방송, 인터넷, 통신 회사의 포르노급 옐로 마케팅은 외려 귀여운 정도다. 필설로 다 열거하자면 경부고속도로가 모자란다. 상류는 상류대로 서민은 서민대로 질과 양에서 결코 우열을 잴 수 없는 모럴해저드를 품고 살아간다. 고급 엘리트나 촌 무지렁이도 모럴해저드에서만큼은 차별이 없다. 이념가나 정치가들은 약아 빠진데다 언설이 교활해서 꽁꽁 숨긴 모럴해저드의 꼬리를 찾아내기 힘들다.
하지만 자기들끼리는 너무 잘 아는 모럴해저드의 취약한 사슬이 있다. 월급쟁이도 오너도 각자 자기들만의 분수에 적합한 모럴해저드가 다 있다. 이 ‘모럴해저드’만큼 우리 사회에 평등한 물건도 없다. 누가 누굴 탓하기도 우습고 뭔가 밝힌다는 게 서로 간에 흠집만 낭자히 남길 게 뻔해 뵌다. 이 일을 어찌할까? 이 모럴해저드의 물결이 어서 흘러가기를 모럴해저드 심보로 지켜봐야만 할 것인가?
모럴해저드를 우국지사처럼 지적질하는 나는, 내 안에 생존본능으로 융합되어 있는 이 모럴해저드는 또 어쩔 것인가? 이런 글을 썼다고 해서 모난 돌 정 맞는 효과를 걱정하며 한숨 쉬는, 싱숭생숭한 이 마음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모럴해저드가 트렌드라면 뒤따라야 편한데, 왜 그게 잘 안 되는 걸까? 맑은 물도 아니면서 물고기 안 놀까 노파심에 휩싸인 이 오지랖이 버거운 건 나에게만 해당되는 사건일까?
[트렌드아카데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