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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대 유학자이자 충신 퇴계 이황 선생이 어서 빨리 자기 곁으로 와서 중책을 맡으라는 명종 임금의 명을 고사하며 올린 상소문 일부를 패러디해봤다.
퇴계 선생의 문장은 침착, 곡진, 완곡, 은유, 함의, 형이상학으로 가득 차, 심금을 울리는 '글의 미학'을 느끼게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속물 서생들은 그저 분수에 맞는 패러디가 제격일 것 같아 감히 흉내 냈는데,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임금이 내린 벼슬을 고사하는 퇴계 선생의 일화는 고봉 기대승과 8년간 주고받은 편지에 여러번 반복되는 주제다. 젊은 선비로 현직에서 격무에 시달리는 기대승의 푸념과 시골 서원에 앉아 독서에 몰두하면서도 임금의 거듭된 대궐행을 거절하며 겪는 퇴계의 마음고생이 오버랩되며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퇴계는 학문을 갈고 닦고 싶어 벼슬에서 물러나려 해도 물러날 의사를 비치면 더 높은 벼슬을 내리는 통에 아주 죽을 지경이라는 이야기를 기대승과 나누면서, '벼슬길에 들어선 것 자체가 원죄'라고 자탄했다.
또 기대승이 "벼슬길에서 물러나려는 순수한 본심을 몰라주는 이런 저런 구설수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그냥 내 마음대로 하겠다"고 선포한 데 대해 '나라의 월급을 거절해서 구설수에 올랐던 제자에게'차라리 남들처럼 월급을 타먹으며 시침 뚝 떼고 있어 보라'는 조언도 있더라'는 주자 선생의 일화를 들려주며 타협안을 제시해주기도 했다.('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중, 소나무 출판사 간)
벼슬에 들고 나는 처신 문제에 대한 두 유학자의 담론은 이 외에도 시시콜콜 구구절절 길고 빈번해서 지루할 정도다. 그러나 결론은 한가지다. "한번 벼슬길에 올라 자칫 실수라도 할라치면 남들에겐 폐가 되고 자기에겐 치명상이 되나, 학문에 몰두하여 분수를 지키고 살면 평생이 즐겁고 행복하며 궁극적으로 천하에 도움이 될 것이다"가 그것이다.
요즘 정치권에서는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재보선 후 논공행상과 지도부 재정비를 둘러싼 권력투쟁이 치열하다. 여당은 전당대회 후 재보선 승리의 영향으로 당직 인선에 한창이고 야당은 패배 후 지도체제 재구성에 헉헉거리고 있다.
이 와중에 여야는 너나 할 것 없이 내 편, 네 편 갈라져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다.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의 명분은 그럴 듯 하다. 하지만 결국 '누가 높고 알찬 당직을 차지할 것이냐, 어떤 세력이 당내 의사결정권을 휘두르는 막강한 자리에 앉을 것이냐'하는 '자리 다툼'이 핵심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쟁투에 체면을 따질 겨를이 없어서인지 후배가 선배를 나무라는 하극상이 난무하고 인신공격과 자질론 공방이 불거진다.
평소 얼빠져 있던 파벌 참모들은 프로와 아마추어 가릴 것 없이 물 만난 고기처럼 정국 동향의 유불리와 상대 진영의 강약을 계산한 정치적 잔꾀 가득한 보고서를 공급하며 충성 경쟁에 혈안이다.
안타깝게도 이들의 주장과 전략 어디에도 대의와 명분은 찾아 볼 수 없다. 투정과 푸념, 모함과 배신, 고함과 뒷통수만 난무한다.
퇴계와 고봉이 왜, 벼슬길에 나선 것을 후회하고 중책을 맡으라는 임금의 거듭된 명령을 거절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는지 이마를 소리나게 때리며 깨닫는 요즘이다.
<트렌드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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