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김대중 서거…정몽준.이재오.정세균 ‘새별로’
2009년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등 정치거목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 생을 마감한 한해였다. 그 자리를 정치 신인들이 물려받았다. 4월, 10월 재보선을 거치면서 기존의 정치세력을 능가할 신진 세력들이 활개를 활짝 편 한해였다.
5월23일 비극적으로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 19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뒤 5공 청문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고인은 김대중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거쳐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당선됐다.
고인은 200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종로를 포기하고 부산에서 출마하는 등 정치를 하는 내내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소신으로 ‘바보 노무현’으로 불렸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라는 한국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이 결성되기도 했다.
대통령 재임 시절 지역주의 타파와 권위주의 청산에 힘썼고 2004년에는 선거법 위반 논란으로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 탄핵소추를 당했다.
고인은 퇴임 후 고향인 봉하마을에 내려온 뒤 가족들의 비리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던 중 유서를 남기고 사저 뒷산의 부엉이바위에서 투신, 자살했다. 고인은 500만명이 넘는 추도행렬 속에 정국을 격랑 속으로 몰아넣었다.
올 해는 또 한명의 별이 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85세의 나이로 8월18일 서거했다. 1925년 전남 신안에서 태어난 고인은 1963년 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된 뒤 6, 7, 8, 13, 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고인은 1971년 대선에서 신민당 후보로 나섰으나 석패한 뒤 1987년, 1992년 대선에서 연거푸 낙선한 끝에 1997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고인은 1972년 유신체제 등장 후 1987년 6월 항쟁 전까지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반체제 인사로 분류돼 잇따라 투옥, 수감되고 해외 망명생활을 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1980년에는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
고인은 민주화 투쟁과 인권신장, 통일운동에 평생을 헌신해 그 공로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이 같은 업적은 고인의 장례가 전직 대통령 사상 처음으로 국장으로 치러지는 밑바탕이 됐다.
두명의 정치 거목이 생을 달리했던 이해 신진 정치세력들은 국민의 집중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는 지난 2007년 12월 한나라당에 입당한지 21개월만에 대표직을 승계, 여권 주류로 자리매김했다. 작년 4·9 총선에서 서울 동작을로 지역구를 옮겨 민주당 정동영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데 이어 같은 해 7월 최고위원 경선에서 2위를 차지하고 지난 9월 집권여당 대표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 한 것이다.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서 높은 대중적 인지도에 더해 제1당의 조직에 안착할 기회를 잡은 동시에 무소속 의원에서 집권여당의 핵심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또 지난 10·28 재보선에서 특유의 근면함으로 종횡무진, ‘여당 전패’의 사슬을 끊는 데 기여했고, 당내 계파 구도, 칸막이 정치를 깨뜨리기 위한 화합과 소통의 정치를 강조해왔다.
야권에는 정세균 민주당 대표가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두 번의 재·보선에서 연승을 거두면서 안정적인 ‘롱런 체제’의 초석을 다졌다.
‘미스터 스마일’이라는 애칭답게 특유의 포용의 리더십으로 대선과 총선 연패로 존립 위기에 처한 당을 추스르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다.지난 7월 미디어법 정국에서 단식농성과 의원직 사퇴를 불사하며 대여 투쟁의 선봉에 서면서 야성(野性)이 부족하다는 일각의 비판도 불식시켰다.노 전 대통령과 김 전 대통령의 서거 때 ‘상주’를 자임하며 조문정국을 주도하면서 제1야당 지도자로서의 이미지가 더욱 부각됐다.
이 같은 당내 위상을 반영하듯 정 대표가 내년 지방선거 직후까지 임기 2년을 모두 채우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확산되고 있다.
여권의 권력지형은 요동쳤다. 이재오 전 의원은 지난 4월 미국에서 귀국한 뒤 비교적 조용한 행보를 이어가다 지난 9월 국민권익위원장으로 발탁되면서 다시 전면으로 나섰다. 이 위원장은 현장을 발로 뛰며 갖가지 민원을 청취하고 해결하면서 ‘실세 위원장’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정운찬 국무총리는 야권을 중심으로 영입설이 나왔던 터라 총리 지명 자체가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총리 내정 일성부터 ‘세종시 수정론’을 들고 나와 정국을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었다.
박근혜 전 대표는 미디어법 처리와 세종시 논의 과정에서 당내 지분을 거듭 각인시키며, 차기 주자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박 전 대표의 득표력이 다시 한번 확인될 전망이다.
아주경제= 송정훈 기자 songhddn@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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