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히 들어 너무나 익숙해진 말, 프랑스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고귀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귀족의 사회적 의무’를 의미한다. 부와 권력, 명성을 가진 사회 지도층일수록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의무를 앞서서 실천해야 한다는 말이다. 역으로는 사회 지도층들이 국민으로서 의무를 실천하지 않을 때 이를 비판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사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로마제국 귀족들의 불문율이었다. 그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노예와 달리 사회적 의무를 실천할 수 있다는 것에 방점을 찍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의 이 전통은 근·현대에 와서 계층 간 대립을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방편으로 등장한다. 전쟁과 같은 국난을 맞았을 때 의식 있는 가문의 경우 자신들은 물론 자녀들까지 참전했다. 국민 통합을 위한 기득권층의 솔선수범을 보여준 것이다.
1·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고위층 자제가 다니던 이튼칼리지 출신 중 2000여 명이 전사한 일이나 포클랜드전쟁 때 영국 여왕의 둘째아들 앤드루가 전투헬기 조종사로 참전한 것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기 위함이다.
6·25전쟁 당시에도 미군 장성의 아들 142명이 참전해 35명이 목숨을 잃거나 큰 부상을 입었다.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의 아들은 야간폭격 임무 중 전사했고, 마오쩌둥은 참전한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시신 수습을 포기하도록 지시한 일화는 아직도 회자된다.
우리나라에도 사회적 책무를 다한 가문이 수없이 많았다. 정조대왕 당시 흉년이 들어 기근에 시달리던 제주도 사람들을 위해 전 재산을 털어 쌀을 사 무상으로 나눠 준 거상 김만덕,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이가 없게 하라는 가훈을 300년 동안 실천한 경주 최부잣집 등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군수업으로 번 막대한 재산을 항일운동에 사용한 최재형 선생이나 가문의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전 가족이 만주로 이주해 독립군을 양성했던 우당 이회영 선생과 같은 독립지사들도 수없이 많았다. 친일파들이 물을 흐리긴 했지만.
반면 현대로 올수록 사회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은 실종된다. 이미 사회 지도층의 병역기피는 만연됐고, 부도덕함은 국민들의 공분을 사기에 이르렀다. 대신 온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비리를 저질러 저녁 뉴스의 단골손님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지도층의 사회적 책무가 무엇인지도 헷갈린다. 과부사정 홀아비가 알아준다더니, 진심이 담긴 측은지심은 국민들끼리 나누고 있으니 말이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오른 이의 말 바꾸기나, 그를 끌어들여 세종시를 껍데기만 남도록 종용하고, 방송 장악에 혈안이 된 정권에게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과분하다. 외려 이를 실용주의(기회주의라고 해야 맞다)라고 호도하는 ‘철학’없는 ‘상전(上典)’이 있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존경받는 ‘어른’을 가져보지 못했다. 이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어른’이 없는 시대여, 봉기하라!
아주경제= 김훈기 기자 bom@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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