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은 그림을 그리는 작가에게는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다. 르네 마그리트(1898~1967)는 “나는 이전에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사물을 보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림 읽는 CEO’의 저자 이명옥 사바나미술관장은 그림 속에 숨어있는 창조력을 이끌어냈다. 저자는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화풍의 변화야말로 작가 개인의 놀라운 창조력을 토대로 이뤄졌다는 점에 주목한다.
미술 작품 전체를 좌우하는 색채의 자유로운 사용이 불과 몇 세기 전만해도 금기시됐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앙리 마티스(1869~1954)는 ‘모자를 쓴 여인’에서 인물의 얼굴을 살색 대신 녹색과 파란색을 섞어 표현했다. 당시의 화랑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묘사하지 않은 마티스의 그림을 지탄했다. 그러나 마티스는 “내가 그림을 그리는 까닭은 감정을 묘사하기 위해서다. 감정이 없는 화가는 그림을 그리지 말아야 한다”고 당당하게 털어놓았다. 결과적으로 파격적인 원색의 사용은 화단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됐다.
팝 아트의 제왕으로 불리는 앤디 워홀은 생전에도 스타화가로서 인기를 누렸다. 그의 창조력 근원은 기존에 누려왔던 엘리트 의식을 과감히 내려놓는데서 시작됐다. 워홀은 슈퍼마켓에 가면 쉽게 살 수 있는 수프 통조림을 사진으로 찍은 다음 이를 실크 스크린 기법을 통해 대량으로 생산해냈다. 작가 스스로 순수 미술이 가지는 원본의 가치를 과감히 파괴한 것이다. 그는 현대 미술을 비웃기라도 하듯 누구나 자신의 그림처럼 그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견고한 미술의 권위를 스스로 깨뜨렸다.
자신이 믿고 있는 가치를 흔들림 없이 추구하는 것도 창조력의 근간이 된다. 영국 현대 미술의 거장을 꼽히는 데미안 허스트(1965~)는 16세부터 시체 공시소를 드나들며 사체를 스케치했다. 그는 스스로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영원한 삶을 갈망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죽음을 도처에 두고 있는 인간은 결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믿음이다. 그는 ‘살아있는 누군가의 정신 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인 불가능성’이라는 작품에서 거대한 유리 진열장에 죽은 상어를 담았다. 허스트는 이러한 장치를 통해 거부할 수 없는 죽음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줬다.
창조력의 실체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식의 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 후기 화가인 정선(1676~1759)은 30세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화풍을 옮겨 그리는 관념산수의 틀에 갇혀 있었다. 그는 점차 눈앞에 펼쳐진 조선의 산수를 있는 그대로 화폭에 담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된다.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비 개인 서울의 인왕산 절경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거대한 바윗덩어리를 감싸고 있는 물안개의 형상이 몽환적으로 펼쳐진다. 그 틈새로 보이는 솔밭과 마을의 전경이야 말로 진정한 우리네 풍경이다. 한국 미술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선구자로서 가치가 빛나는 순간이다.
아주경제= 정진희 기자 snowway@ajnews.co.kr
(아주경제=ajnews.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