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전대통령 서거>故노무현 전 대통령, ‘파란만장’의 삶

2009-05-23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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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오전 63세를 일기로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난 일생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원칙과 지역주의에 항거했다가 번번이 좌절한 ‘소신’을 무기로 대통령까지 오른 노 전 대통령이다.

호남에 지역기반을 둔 민주당의 영남 출신 대선후보, 국회 탄핵소추안이 의결되고 야당에 대연정을 제안한 헌정사상 첫 대통령 등 그의 정치역정은 그야말로 파격과 기록, 그 자체였다.


그러나 퇴임 후에는 전직 대통령들처럼 비운의 길을 걸어야 했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 파문에 자신과 측근들이 연루되면서 재임시절 부르짖었던 ‘깨끗한 정치’는 결국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1946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비상한 두뇌를 지녔지만 가난 때문에 대학 진학의 꿈을 일찌감치 접고 부산상고에 진학했다.

30살 때 사법고시에 합격한 그는 판사의 길을 걷다 적성에 맞지 않아 7개월 만에 그만두고 변호사로 전직했다.

그런 그가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87년 9월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 사건 이후부터였다.

당시 사인 규명에 나섰다가 3자 개입 혐의로 구속됐지만 돈키호테 같은 용기를 눈여겨본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 측의 권유로 88년 13대 총선에 출마, 5공 실세였던 허삼수(許三守) 후보를 꺾고 정치에 입문했다.

초선의원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신데렐라처럼 부상, 한국정치의 새 희망으로 떠오르게 한 무대는 88년 5공 청문회였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 힘있는 증인들을 정연한 논리와 송곳 질문으로 몰아세워 TV를 시청하던 국민을 열광시키면서 ‘청문회 스타’로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이후 정치인으로서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90년 1월 3당 합당 때 김영삼 총재의 손을 뿌리치고 합류를 거부한 뒤 지역주의의 벽에 막혀 낙선을 거듭하는 등 비주류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이후 98년 보선에서 첫 금배지를 달았지만 2000년 총선에서 한나라당 허태열 후보에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바보 노무현’이란 이름이 대중에 각인되면서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바람이 일었고, 이는 2002년 대선에서 ‘노풍’을 일으킨 기폭제가 됐다.

그는 대선일 막판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가 후보단일화를 철회하면서 위기를 맞았으나 과감히 정면돌파를 택하는 ‘승부수’를 던지고 결국 당선됐다.

노 전 대통령의 승부사 기질은 대통령 재임 중에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2004년 3월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야권이 여소야대 구도에서 열린우리당 지지 발언 등 선거법 위반 혐의를 걸어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발의했지만, 되레 메가톤급 역풍을 불렀고, 결국 제3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의 의회 독주에 제동을 걸며 과반을 차지하는 제2의 기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정치, 경제, 대북관계 등 거의 우리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노 전 대통령의 무모하게 보이는 정치 실험은 그칠 줄 몰랐고,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되는 청와대발 충격 발언은 민심이반과 열린우리당의 지지율 급전직하로 이어지면서 오히려 국정 난맥상을 야기한 자충수가 됐다.

거듭된 재보선 전패로 의회 과반을 잃고 뿌리채 흔들리던 열린우리당은 결국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에 참패했다. 사실상 국정운영의 동력을 상실, 조기 레임덕에 빠지자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는 승부수를 던졌지만 박근혜 전 대표에 외면 당했다.

이후에는 아파트값 급등과 북한 핵실험 사태 등이 맞물리면서 여당 내부에서 탈당을 요구하고 나서는 등 ‘아군’들 마저 등을 돌리기도 했다.

이에 노 전 대통령은 정국 타개책으로 4년 연임제 개헌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들고 나왔지만 역시 한나라당의 거부로 뜻을 접어야 했다.

대신 남북 화해협력 관계 정립에 매진, 8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한 것이 대북관계에서 큰 업적으로 남았다.

하지만 퇴임 후 불거진 박연차 뇌물 게이트는 노 전 대통령의 거의 유일한 자산이었던 도덕성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인생행로를 함께 걸은 진보진영 정치인들과 386들, 그리고 인생의 버팀목이었던 친형 건평씨와 부인 권양숙 씨마저 수뢰 혐의로 검찰에 줄줄이 불려나가는 현실 속에서 구차한 삶보다 ‘정치인 노무현’으로서 후대의 평가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안광석 기자 novus@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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