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 칼럼] 역사는 되풀이 된다…그렇다면 2025년 을사(乙巳)년은?

2025-01-08 16:56

[고려대 표준·지식학과 교수]

을사년 새해 시작부터 해외출장으로 정신이 없었다. 호텔에서 잠시 정신을 차리고 나니 한국에 있을 땐 잘 보지도 않던 YTN과 KBS 글로벌을 통해 우리나라의 상황을 볼 수 있었다. 한국을 떠나있다 보니 오히려 국제뉴스를 자주 접하게 되었다. 특히 1월 3일 한국의 대통령 체포영장 발부에 따른 집행에 대해 국제적 관심이 높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땠는지 잘 모르지만, 중국, 일본, 미국 등의 전세계 언론은 각국의 언어로 거의 하루종일 한국의 대통령 체포영장 발부에 따른 현장 상황과 공수처의 내용을 시시각각 전달했다.
 
블룸버그 뉴스에서는 한국의 대통령 체포 관련 뉴스로 한국 관련 주가에 긍정적이라는 자막이 떴을 정도였다. BTS 이후 해외에서 한국과 관련된 이야기를 이렇게 많이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 느낀 한국인으로서의 뿌듯함과는 달리 이번에는 부끄럽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사실 우리에게 을사년은 역사 속에 많이 언급되는 해이다. 과거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통해 우리나라 아니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는 치욕을 경험하였고,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를 통해 조성 왕실의 외척인 대윤(大尹) 윤임과 소윤(小尹) 윤원형의 반목이 일어난 사림(士林)의 화옥(禍獄)으로 소윤이 대윤을 몰아낸 사건이다. 솔직히 우리가 중·고등학교에서 한국사를 배웠지만, 시험을 위해 봤지 제대로 정확히 내용을 들여다 본 적이 별로 없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본인 역시 찾아보았음을 다시금 밝힌다.
 
을사사화의 배경은 1519년(중종 14)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1506년 연산군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이복동생 중종은 자신을 도운 신진사류를 등용해 유교적 정치 질서의 회복과 교학에 힘을 쏟았다. 이러한 새로운 조선의 변화 속에 정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 조광조, 김식 등 신진사류였다. 사료에 따르면, 당시 조광조는 1515년 성균관 유생 200인의 추천으로 관직에 올라 왕의 엄청난 신임을 받았다 한다. 중종의 신임을 받는 조광조를 위시로한 신진사류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추구하는 지치주의(至治主義) 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다.
 
주된 성과로는 과거제 폐단을 혁신하고자 현량과 설치를 통해 신진사류 등용하였으며, 소격서 폐지를 통해 도교의 미신 타파에 힘쓰고, 향촌규약을 실시해 지방의 상호부조와 미풍양속을 배양하며 유교정치 구현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청렴결백과 원리원칙에 입각한 태도는 기성세력을 소인시함으로써 세조의 왕위 찬탈에 협조하여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던 훈구(勳舊) 재상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신진사류의 급진적 변화는 중앙 정계에 진출했던 진보적 사림파들이 마치 신권을 장악하고 왕권을 위협하는 듯한 모습으로 비춰짐으로써 도리어 훈구세력들의 증오와 반감을 사게 되었다. 당시 반정중신으로서 조광조, 김식 등의 탄핵을 받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였다 하니, 조광조 일파에 대한 기성 훈구세력의 불평불만은 극에 달했다. 결국 1519년 중종반정공신 가운데 그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많아 이들의 공신호를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인의 공신호가 삭퇴되고 토지와 노비마저 환수한 반정공신 위훈삭제사건(反正功臣僞勳削除事件)을 계기로 폭발하게 되었다.
 
사림의 의도 자체는 훈구세력의 부당한 재원을 막고 사대부의 기강을 바로 잡자는 의도였지만, 결과적으로는 훈구대신에 대한 도전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조광조의 탄핵을 받는 남양군은 희빈 홍씨를 통해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고 밤낮으로 왕의 마음을 흔들었으며, 궁중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 : 조씨 성을 가진 자가 왕위에 오른다)’이라고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 뒤, 그 문자의 흔적을 왕에게 보여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다. 결국 위기의식을 느낀 중종이 신권을 견제하기 위해 조광조, 김식, 기준, 김정, 한충 등을 멸하고 나머지 사림들을 귀양보내거나 정계 진출을 막았다.
 
이후 주초위왕 설이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일화로 알려졌지만 후대에 루머였음이 밝혀져, 지금에 와서는 중종의 친위쿠데타로 묘사되고 있다. 사실 이후 많은 언론에서 주초위왕에 대한 실험을 진행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다. 《정원일기(政院日記)》에 당시 중종은 사화를 일으키기 전에 이장곤, 김전 등 사림 중 조광조 반대파와 사림의 개혁 정치에 반대했던 훈구파 대신들을 궐로 불러온 다음 병졸들을 경복궁 안으로 끌어들여 본격적으로 소위 계엄을 전개하였다.
 
또한 해당 내용은 50년이 지난 선조실록 1568년 기사에 당시 중종은 조광조 일파로의 정보 전달을 차단하고 몰래 숙정문으로 군 병력을 소집하여 조광조 세력을 긴급체포하였다. 당시 중종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형을 주장하였으나, 결국 귀양을 보내게 되었고, 중종은 기어코 추가 죄목을 찾아 조광조를 숙청하였다.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에게서 인종을 낳았고, 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에게서 명종을 얻었다. 을사사화의 배경은 같은 파평윤씨 종씨이면서 서로 세력을 잡기 위해 반목에서 시작되었다. 이들 두 계비는 같은 파평 윤씨임에도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尹任)과 문정왕후의 아우 윤원형(尹元衡)이 서로 외척 세력을 잡기 위해 대립하기 시작했고, 당시 세간에 윤임은 대윤(大尹), 윤원형은 소윤(小尹)이라 불렸다.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게 되자 윤임이 먼저 득세하여 사림의 명사를 등용하기 시작하며 사림은 그 기세를 회복하는 듯 하였다. 당시 뜻을 얻지 못한 이들은 문정왕후의 아우 윤원형의 밑에 모여 사림과 반목하고 윤임 일파에 대한 반격의 기회를 잡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인종이 겨우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하고 12세의 명종이 즉위하며 왕대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면서 형세가 역전되었다. 소윤 윤원형이 득세하며 윤임 일파를 제거하게 된다. 을사사화는 상대 세력의 와해를 위해 약 6년여에 걸쳐 계속되었으며 갖가지 죄명으로 유배되거나 죽은 자의 수가 거의 100명에 달하게 되었다. 이처럼 을사사화는 모후와 외척이 정권을 전횡하며, 훈구세력이 전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진보를 추구하던 사림의 정치적 기반은 대소윤의 권력 투쟁 속에 더욱 축소되는 사태를 만들어냈다.
 
역사는 반복되고 되풀이되는 경향이 많다. 그렇다면 이번 을사년에는 어떠한 일들이 있을까? 중국에서 을(乙)은 갑(甲)의 다음으로 그 의미가 성장을 기다리며 힘을 모으는 상태라 인식된다. 또한 현실에서 뱀이라 하면 무섭고 피해야 한다 생각되지만, 십이지의 뱀(巳)은 뛰어난 환경 적응력을 지녔으며, 영특하고 사람에게 먼저 해를 끼치지 않는다. 우리네 민속신앙에도 뱀이 크면 구렁이로, 더 크면 이무기로 자라며, 이무기가 여의주를 얻게 되면 용이 되어 승천한다는 속설이 있다. 둘 다 기다리며 힘을 모으는 상태를 뜻한다. 지금 당장 무엇인가 변화를 추구하기 보다는 비록 느리더라도 내실을 꾀하는 한해가 되길 기원한다.



김재영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표준·지식학과 교수 ▷고려대 경영학 박사 ▷한국정보시스템학회 이사 ▷4단계 BK21 융합표준전문인력 교육연구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