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다사다난'이라는 인사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곳
2024-12-31 06:00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시작되는 섣달과 정월에 어울리는 답사지로써 폐사지를 떠올렸다. 한 때는 화려한 한옥들이 저마다 자태를 자랑했고, 처마와 처마가 이어지면서 회랑(回廊 집과 집을 연결시켜주는 통로)에는 국왕과 문무백관 그리고 선남선녀의 발걸음이 끊어지지 않았다.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고 했던가. 만들어진 것은 무엇이건 한동안 머물다가 무너지면서 없어지기 마련이다.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에 있는 법천사지(法泉寺址)도 그랬다. 하얀 눈으로 뒤덮힌 수만평의 절터에 주춧돌과 축대만 남긴 채 해거름에 까마귀 울음 속에서 저녁놀을 배경으로 무심하게 서 있는 당간지주를 바라보고 있으니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우리들의 2024년 역시 좋은 날 굳은 날 그리고 그저 그런 날들이 번갈아 지나갔고 2025년 또한 그럴 것이다.
겨울 해가 가장 늦게까지 비치는 명당에는 비석과 승탑이 차지했다. 두 석조물은 고려예술품의 금자탑이다. 하지만 승탑은 그 아름다움 때문에 많은 수난을 당해야 했다. 1911년 골동품 수집가에 의해 일본으로 밀반출된 것을 조선 초대 총독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852~1919)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 1915년 다시 환수할 수 있었다. 육군대장 출신으로 자신의 관할권 안에 있던 물건이 밖으로 나간 것을 알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유가 무엇이건 우리로서는 참으로 다행스럽다.
하지만 반환 이후 서울도 안전한 곳은 아니였다. 경복궁 뜨락에 있다가 육이오 때 포탄을 맞아 상륜부가 산산이 부서지는 피해를 입었다. 전쟁 이후 어려운 나라살림을 쪼개 얼기설기 떼웠으나 안전진단에 문제가 생겨 2005년 용산국립박물관 완공에도 이사하지 못한 채 그 자리를 지켜야 했다. 2016년 대전국립문화유산연구원으로 옮겨 본격적인 복원작업이 시작되었다. 돌 장인인 고(故) 임천 선생께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 새로운 석재가 필요한 곳에는 원주 귀래면에서 나오는 돌을 사용했다. 대파된 상륜부는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석재를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가장 원석에 가까운 돌이었다. 2021년 복원을 완료하였고 2024년 높이 5m 무게 40톤의 장대한 탑은 백여년 만에 지역사회의 요청에 따라 제자리로 돌아왔다. 법천사 유물관에 단 한 점만 전시하는 형태였다.
동쪽 언덕 위의 비석을 찾았다. 가지고 간 공양물을 올리고는 인사를 드렸다. 용처럼 수염이 난 거북의 등 껍질 마다 ‘왕(王)’라는 글자를 새겼고(일 없는 사람이 세어보니 88개라고 한다) 비석 측면부는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의 용틀임을 조각했다. 비석 상단부의 구름무늬 디자인도 예사롭지 않았다. 덕분에 돌아와서 비문 전체를 샅샅이 읽어보게 되었다.
1609년 허균(許筠 1569~1618)이 찾았을 때 5m 높이의 이 비석은 자기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채 두 동강이 나 있었다고 했다.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비석을 어루만졌다. 탁본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답사가 취미였던 그가 법천사에 가게 된 이유는 지관(智觀)스님의 언질 때문이었다. 임진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589년 법천사에서 머물렀다는 말을 들었던 까닭이다. 허균과 함께 다시 방문했을 때와 20년의 시차가 생겼다. 그래서 법천사가 임진란 때 소실된 것으로 추정하는 근거가 되었다.
허균 뿐만 아니라 허균의 시(詩) 스승으로 알려진 손곡 이달(蓀谷 李達 1539~1609) 선생도 법천사 언저리에 그 흔적을 남겨 두었다. 그의 이름을 딴 손곡리 마을길에는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에서 1983년 시비(詩碑)를 건립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 손곡선생은 당시(唐詩) 전문가였다. 허균은 스승의 시를 “맑고도 새로웠고 단아하고 고왔다(淸新牙麗)”고 평했다.
하지만 이달은 서얼출신이었다. 벼슬길이 막혀 주유천하 하면서 글로써 벗을 삼으며 평생을 소일했다. 나중에 허균의 한글소설《홍길동전》모티프를 제공한 인물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라는 말은 지금도 패러디가 될 만큼 유명한 말의 출전이기도 하다. 허균은 이를 부연설명한 〈유재론(遺才論)〉을 지었다. “인재가 없다는 것은 인재를 버리고서(遺才) 한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당시 세태를 엄중하게 질타했다. 그가 죽은 뒤 허균은 《손곡집(蓀谷集)》을 펴내며 서문을 썼고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이란 일대기를 정리하는 방식으로 시대의 계급적 모순에 저항했다.
법천사 비석과 승탑의 주인공은 고려 문종(재위1046~1083)임금 때 왕사와 국사를 지낸 지광(智光984~1070)국사다. 원주 출신으로 원씨(元氏)집안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우물에서 물이 솟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8세에 법천사로 출가했으며 법명은 해린(海麟)이다. 어릴 때부터 한 가지를 들으면 천가지를 깨달을 만큼(一聞千悟) 총명했다. 폭포수가 흐르는 것 같은 뛰어난 말 솜씨(懸河之辯)로 주변을 감화하여 ‘강진홍도(講眞弘道 진리로 가르침을 널리 펴는 강의)’라는 법호를 받을 정도였다. 수도 개성에서 주로 활동했다. 말년에 고향이며 출가본사인 법천사로 돌아와서 몇 년 머물다가 열반했다.
국사는 당시 조정의 실세인 이자연(李子淵 왕의 장인)의 다섯번째 아들을 제자로 두었다. 소현(昭顯1038~1096)대사였다. 소현 역시 국사처럼 뒷날 개성의 왕실사찰인 현화사(玄化寺) 주지와 승통(僧統 승려의 우두머리)을 역임했다. 비문에 첫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두 번째로 이름을 올린 속리산 법주사의 석탱(釋竀)화상은 문종임금의 여섯 번째 아들이다. 비석과 승탑이 걸작품이 될 수 밖에 없는 배경을 짐작할 수 있겠다.
국사 사후에 때 왕은 원주에 소재한 국가관리 창고에서 장례식에 필요한 경비를 충당토록 했다. 남한강과 섬강이 만나는 이 지역은 예로부터 물길교통이 편리하여 인근 지역에서 세금으로 거둔 물건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다. 지금도 흥원창(興元創)이란 창고 터가 남아있다. 이제 그 자리는 두 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로써 저녁노을의 명소가 되어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우리 답사팀 일행도 노을이 지는 시간에 맞추어 그 자리를 함께 했다. 그렇게 다사다난 했던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통과의례를 치루었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