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마카오(Macau)가 있기 전에 마조각(媽祖閣)이 있었다

2024-09-29 06:00

[원철 스님]


 
마카오 중국반환 25주년 기념법회에 참석했다. 오문(澳門)불교협회 초청에 의한 것이다. 방문선물은 중국정서를 잘 아는 통역가 선생께서 미리 준비한 김 4박스였다. 다시금 한국 김의 인기를 실감하는 순간이다. 비행기로 3시간30분남짓이면 갈 수 있는 멀지 않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처음 방문하게 되었다. 태풍이 오는 길목을 용케도 피해 무사히 예정 시간에 맞추어 도착할 수 있었다.
 
출발 며칠 전에 서점에 들러 관광안내 책자를 구입했다. 잘 알지 못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이 홍콩에 관한 내용이고 마카오는 덤으로 얹혀있을 만큼의 적은 분량으로 구성된 얇은 책이다. 안내책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sns시대에는 오히려 검색이 호기심과 많은 궁금증을 해결해준다.
 
마카오는 15세기 명나라 때 개항했으며 주로 포르투갈 상인들이 드나들면서 무역을 한 거점지역이다. 이후 상인들은 정식으로 세금을 내면서 공식적으로 체류하는 절차를 밟았다. 아편전쟁 후 1887년 포르투갈 영토로 편입되었다가 1999년 중국에 반환했다. 인구 60여만명에 서울 은평구 정도의 면적이라고 한다. 이웃에 있는 홍콩은 700만명이라는 과밀도의 인구를 가졌다. 향항(香港)은 반환 할 때 국제뉴스로 떠들썩했고 그 이후에도 양국(중국·영국)의 경제체제 차이로 인한 불협화음은 물론 거주민과 정치적 갈등으로 인하여 외신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린데 비하여 마카오는 상대적으로 무탈한 곳이였다.
 
마카오(Macau)란 이름의 근거부터 찾았다. 지명의 발상지는 ‘마조각(媽祖閣)’이다. 중국어 ‘마쭈거’가 ‘마카오’(포르투갈어)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공식한자표기인 오문(奧門 아오먼. 의미:항구의 문)은 한 때 마교(馬交 마가우. 광동어)로 표기하기도 했다. 현재는 오문(奧門)이라고 쓰고 ‘마카오’라고 읽는 것으로 공식화된 모양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801년 가을 제주도에 표류한 외국인의 국적을 ‘막가외(莫可外)’라고 적었다. 이 역시 ‘마카오’와 발음이 유사하다.
 
마조(媽祖)는 뱃사람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바다의 여신이다. 마카오(Macau)라는 지명의 발상지인 마조각(媽祖閣)이 있는 아마사원(媽閣廟)은 유교 불교 도교 민간신앙이 합쳐진 ‘만신전(萬神殿 판테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육백년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문화유산이다. 마조각을 중심으로 하여 차츰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도시가 형성되었다. 지역민은 마카오의 근원이자 마카오의 시작인 마조각을 이렇게 찬탄했다. 

“선유마조묘(先有媽祖廟) 후유오문성(後有奧門城)
처음에는 마조묘(媽祖廟)가 있었고 그런 다음에 오문성(奧門城)이 생겼다.”

광동성 광주(廣州 광저우)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인 광효사(光孝寺)에도 “미유양성 선유광효(未有羊城 先有光孝) 광저우가 있기 전에 광효사가 있었다”는 말이 전한다. 양성(羊城)은 광저우의 또다른 이름이다. 《육조단경》에서 광효사는 법성사(法性寺)로 불렀다. 중국선종의 실질적 개산조(開山祖)인 혜능(惠能638~713)행자가 인종(印宗)법사를 만나면서 삭발한 곳이다. 그 머리카락을 사리(舍利)처럼 모셔둔 예발탑(瘞髮塔. 瘞:묻을 예)이 가장 유명하다. 마카오 반환법회에 참석한 광효사 주지 명생(明生 밍셩)대사를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마카오 보제선원 관음당 입구/원철스님 제공] 


 
유일한 관광일정은 마카오에서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보제선원(普濟禪院) 관음당(觀音堂)을 참배한 일이다. 태풍 후 비 그친 오후 틈새를 이용하여 찾았다. 원(元)나라때 창건되었으니 마조각과 비슷한 600년 연륜을 가졌다. 시내 큰길가에 있는 도심형 사찰이었다. 몇 개의 불당(佛堂)을 지나가며 미로같은 복도를 계속 꺾으면서 몇번씩 걸어야 하는 건물구조였다. 중심건물에는 관세음보살을 모셨다. 이 사찰의 다른 이름인 ‘관음당’의 뿌리가 되는 곳이다. 야외에는 높이20m 무게50톤 관음상을 모셨는데 이 역시 마카오 반환을 기념하는 작품이었다.
 
보제선원의 뜰에서 대리석으로 만든 둥근 탁자와 의자 4개 앞에서 일행들은 멈추어 세웠다. 중국과 미국의 조약이 체결(1884년)된 역사적인 장소로 근대사의 아픔이 녹아있는 곳이였다. 하기야 육백년 동안 무슨 일이 없었겠는가? 원·명·청의 왕조가 교체되었으며 또 열강의 침탈까지 고스란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3보제선원, 중미 조약체결현장] 


2박3일의 공식일정에 쫓겨 결국 찾지 못한 아쉬움이 지금도 남아있는 마조사원을 대신하여 관음당을 찾은 것으로 달랜 셈이다. 왜냐하면 불가의 관음보살은 도가의 마조 역할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역할도 비슷하고 외형도 닮았으며 주로 바닷가에서 쉬이 만날 수 있다. 주지 계성(戒晟 지에청)대사의 자상한 미소와 안내 덕분에 딱딱한 공식행사 속에서 그나마 긴장감을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마카오불교총회장 소임을 맡아 이 행사를 주관한 위치인지라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책임감이 뚝뚝 묻어난다.
 
돌이켜보니 행사장 다닌 것 외에는 별다른 기억도 남아있지 않는 짧은 일정이었다. 비슷비슷한 내용의 지루한 축사는 어떤 행사장이건 치뤄야 하는 통과의례였다. 그래도 기행문 원고를 정리하기 위해 이미 추억이 되어버린 한 컷 한 컷 담아놓은 장면들을 챙겨보며 그 날의 기억을 되살렸다. 사진 속에서 오가는 길은 호텔버스를 이용한 시내관광이 되었음을 알았다. 섬과 다리가 이어지고 멀리 만(灣) 건너 고층빌딩이 모여있는 마천루가 그리는 스카이라인을 조망했던 기억도 더듬을 수 있었다. 차창 밖으로 흐르는 빗줄기도 제대로 찍혔다. 여행 뒤에 남는 것은 역시 사진 밖에 없다는 말에 다시금 공감했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