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수의 절차탁마] 일하는 사람이 아름답다

2024-10-31 15:48

[이두수 작가]

영주에 내려와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일한 지 4개월이 지나간다. 그간 아파트도 많이 올라가 기본 골조공사는 이제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할석미장공으로 일하며 주로 땜빵 일을 하고 있다. 땜빵이라고 하면 하찮은 일, 혹은 다른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는 것으로 쉽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 남이 해놓은 것을 다시 수정해야 하는 것은 정밀하고 세밀하게 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나 정성이 곱절이나 든다. 그렇다고 일하고 나서 좋은 소리를 듣기보다는 핀잔을 듣기 일쑤다. 일한 결과가 좋으면 아무 말이 없지만 잘못되었을 경우엔 한 소리 듣는 공정이 바로 땜빵이다.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라고 알려져 있다. 신분제에 의해 사회가 유지되던 조선시대도 아닌 민주공화정의 이 시대에 선비가 어떤 의미를 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시대를 이끌었던 지식인의 이미지를 계승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있지 않나 생각한다. 주소 이전으로 영주시민이 되었으니 어찌 보면 나도 그 선비의 일원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영주에는 소수서원이라는 유명한 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1542년,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고려말 송나라 주자의 성리학을 들여온 유학자인 안향을 기려 그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세우고 유생들을 교육시킬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이 서원은 후에 퇴계 이황이 명종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왕의 친필을 받은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사액서원이란 임금이 서원의 이름을 지은 편액을 하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왕립학교가 되었다는 것이며 서원운영을 위한 여러 혜택을 받는다는 의미다. 사액서원이 되면 왕의 친필 현판뿐 아니라 서원 운영에 필요한 서적, 노비, 토지는 물론이고 면세, 면역 등의 혜택이 따른다. 때문에 소수서원 이후 세워진 전국의 서원들은 경쟁적으로 사액을 받기 위해 노력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영주지역에만 30여 개의 서원이 운영되었다.

이러한 학풍이 이 지역에 있어서였는지, 조선을 백성이 기본이 되는 나라, 민본을 국가이념과 비전으로 정립한 정도전이 영주 출신이다. 영주 시내를 관통하는 서천의 강변에는 지금도 삼판서고택이라는 집이 있는데 이 집이 바로 정도전이 나고 자란 곳이다. 이 집은 처음 정도전의 부친 정운경이 지은 집으로 그의 사위 황유정에게 물려주었고, 황유정은 또 그의 사위 김소량에게 물려주었는데 그의 아들 김담이 모두 판서를 역임했다는 데서 판서 3명이 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집 이름이다.

이렇게 걸출한 인물과 지식인들이 많았던 고장이라 그런지 세조 때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단종폐위를 반대하던 금성대군(세조의 동생)이 세조에 의해 순흥으로 유배를 오자 이 지역 선비들은 금성대군을 중심으로 단종복위운동을 펼쳤다. 안타깝게도 내부 고변으로 발각되어 역사는 이 일을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고 기록하는데 이 일로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당하며 영월로 유배를 가고 금성대군은 사약을 받는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순흥도호부는 폐부당해 현으로 강등되었으며, 여기에 가담한 순흥의 선비들은 모두 처형당하고 순흥 주민 및 인근 30리 지역 주민들에게도 혐의점을 뒤집어 씌워 많은 사람을 처형했다고 한다. 수많은 백성들을 학살하여 순흥부를 가로지르던 죽계천은 온통 피로 물들어 오랫동안 핏물이 10여 리를 흘러들어갔다고 하는데 당시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던지 지금도 영주시 안정면 동촌리는 피끝마을이라고 불린다.

이런 역사적 유래와 아픔을 머금은 이 지역 사람들은 남다른 교육열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 수를 기록한 ‘국조방목’에 의하면 이 지역 문과 급제자 수가 153명으로 전국 4위에 이른다고 한다. 당시 평안도의 평양이나 큰 도회지보다도 더 많은 지식인들을 배출했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소수서원이 처음부터 과거준비와 국가의 관리를 길러내기 위한 인재양성소 같은 관학적 기능이 강했을 것이다. 당시에도 ‘이 서원에서 공부하면 5년도 안되어 모두 과거에 급제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과거의 명소로 급부상했다고 한다. 현대판 스카이캐슬의 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는 역사적 아픔을 ‘입신양명’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지역민들의 욕구가 강했는지도 모른다.

선비란 도대체 무슨 말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사전적인 정의에 의하면 ‘학식 있고 행동과 예절이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관직과 재물을 탐내지 않으며 고결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선비란 인격과 지성을 갖춘 도덕적인 사람을 말한다.

조선의 선비들이 추구하는 길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한다. 입신양명(立身揚名)과 거경궁리(居敬窮理)다. 현재 입신양명(立身揚名)은 세상에 나아가 이름을 세상에 알린다는 뜻으로 약간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명성을 얻어 이름을 드높인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직장이나 사업, 예술과 창작, 사회적인 활동과 봉사, 개인의 성장과 자기계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용될 수 있는 말로 열심이 노력하여 얻어지는 명예로운 결과다. 셀럽이 되는 것이다. 입신양명의 과정이 바로 거경궁리다.  거경(居敬) 은 항상 몸과 마음을 삼가고 바르게 가지는 내적 수양이라 할 수 있다. 궁리(窮理)는 사물의 이치를 널리 파악하여 정확한 지식을 얻는 것으로 외적 수양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조화롭게 이루어 나가는 것이 진정한 자기계발이 되는 것이니 예나 지금이나 선비가 갖추어야 할 이 덕목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선비들이 추구하는 인재상이랄까 모델이 군자다. 선비는 군자가 되는 것이 목표다. 군자는 도덕적이고 품위있는 사람을 말하는데 올바른 가치와 도덕을 추구하며 타인과의 관계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는 사람쯤으로 보면 될 거 같다. 이 군자는 세 가지 즐거움을 즐긴다고 한다. 첫째가 부모님 모두 건강하게 살아계시고 형제와 갈등 없이 잘 지낸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늘과 인간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양심적이며 맑은 삶을 사는 것이고, 셋째는 천하의 영재를 발굴하여 교육하는 것이다. 이것이 군자의 이상적 가치이며 지향점이며 군자의 삶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고결하고 도덕군자인 양하는 선비도 실제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아 때로는 추악한 인물상으로 비치기도 한다. 박지원의 양반전을 보면 양반(선비)이 지켜야 할 덕목 몇 가지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절기비사(絶棄鄙事) 양반은 농업 사업 공업 등 천한 일을 하면 절대 안된다. 자기 밭에 난 잡초 한 포기도 자신이 뽑으면 안되고 꼭 사람을 불러 뽑아야 한다. 수무집전(手毋執錢) 불문곡가(不問穀價)양반 손으로 돈을 만지거나 세면 안되고, 쌀값이 얼마인지 물어서도 안된다.

소설의 형태로 선비의 위선적인 모습을 꼬집은 내용이긴 하지만 대부분 현실적인 지적이었다. 강상(綱常)은 군신(君臣)· 부자(父子)· 부부(夫婦) 등의 관계를 의리·자애·우애·공경·효도 등을 매개로 파악하는 매우 아름다운 용어로 포장되어 있지만 이 유교 윤리가 사회적 통치의 근간 이념인 조선시대에 있어서 강상을 무너뜨리는 행위는 무엇보다도 위중한 범죄 행위였고 이에 대해서 국가는 범죄의 범위와 내용, 그리고 그에 적용되는 형률을 규정하여 엄벌에 처하였다. 사농공상의 차별적 신분제가 매우 엄격하게 적용된 사회였던 것이다.

구한말 의병들이 각지에서 들고 일어난 명분이 겉으로는 왜양 척결이었지만 실상은 바로 이 강상의 도리였다. 개화사상가들이 내놓은 개혁안에서 남녀차별과 신분차별을 금지하자는 내용을 가장 반대하고 급기야는 거병을 하여 조정을 탄핵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들은 지방에서 거병할 때 가마를 타고 다녔으며 종들이 그 가마를 날랐다.
 
[비오는 밖을 바라보는 근로자의 모습이 창밖을 바라보는 선비의 뒷모습처럼 고고하게 느껴진다. 마음의 문제다. 그가 어떤 옷을 걸치고 어디 앉아 있느냐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찰 건물을 짓던 옛 선인들처럼 지금도 장인은 누군가의 행복을 기리며 아파트를 지을 것이다.]

며칠 전 영주에서 의미있는 일을 해보자고 몇 명의 지인들이 모였다. 선비의 고장 영주의 역사에 대해 나눈 이야기들이 대개 이런 이야기들이다. 이 시대 선비의 고장 영주 시민으로서 시민인 선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대안을 모색해보자는 의견이 있었다. 모임의 이름도 지어보았다.  큰일을 일으킬 숨어있는 선비라는 의미로 도모거사.

난 며칠 전에 읽은 이시다 바이간의 <도비문답>이란 책을 소개했다. 도비문답에 나오는 비(鄙)와 양반전에 나오는 절기비사의 비는 같은 한자다. 비루(鄙陋)하다의 그 비자다. 비루하다는 말은 행동이나 성질이 너절하고 더럽다, 허름하고 지저분하다, 하찮고 시시하다 그런 의미다.

그러니까 도비문답은 도회지의 세련되고 아름답고 우아함과 시골스런 허름하고 지저분한 것과의 대화라는 의미다. 아름답고 추함의 대화라고 해도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한쪽은 유학을 이런 식으로 비루한 것을 다루려고 했고 또 한쪽의 유학은 비루한 것을 아예 자르고 버리라고 하는 이런 노력의 차이가 훗날 두 국가의 운명을 갈랐다고 나는 생각한다.   

역사적인 한일관계상 우리가 일본의 중요성과 장점을 거론하는 것은 스스로 토착왜구라는 오명을 뒤집어 쓸 각오를 해야 한다. 일본에 관한 한 학문적인 영역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으며 오직 감정적인 분노로 대해야 한다. 우리는 일본을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알려주려고도 하지 않으며 몇몇의 편견과 무시로 일관된 폄하의 태도를 자랑스럽게 견지해 왔다.

영주에 역사적으로 많은 선비들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영주를 선비의 고장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영주의 선비들이 일반인들이 읽을 수 있는 많은 저작을 남겼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지식인으로 일반 백성을 훈화하고 이끌어주려는 역할을 게을리 한 것이다.

이제 한국의 위상은 세계적인 리더국가의 반열에 서려고 한다. 일본을 넘어서려 하고 있고 무시해도 괜찮을 그런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세계에서 유일하게 일본을 함부로 무시하고 있는 우리는 격동의 근현대사에서 일본이 어떻게 일류국가로 거듭날 수 있었고 조선은 그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일본도 성리학을 받아들였고 주자학이 독존적인 지위로 보장되던 시기가 있었지만 그들이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과는 다른 면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도 사농공상의 신분제가 통용되던 시기가 있었고 상인은 최하위 신분이었다. 이럴 때 이시다 바이간은 상업에서 이윤을 얻는 것은 결코 부끄럽지도 비천하지도 않는 것이라고, 상행위가 경멸의 대상이 아니라고 선언하였다. 여기에 바이간은 중요한 전제를 단다. 아무 이윤이 아니라 정당한 이윤이라는 것이다. 이 정당함을 담보해 주는 것이 도리이고 마음이다. 사무라이에게 무사도가 있듯이 상인에게 상인의 도가 있다고 말한다. 무사가 충성의 도리를 다하고 당당히 봉록을 받듯이 상인들도 손님에 대하여 도리를 다하고 이윤이라는 봉록을 당당히 받으라고 말한다. 그는 상인들에게 의무와 책임, 그리고 긍지를 심어 주었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빗대어 보면 이런 상도가 일본 자본주의 정신의 기틀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인의 이미지가 된 친절, 검소, 근면, 장인정신 등의 가치들은 상당부분 이시다 바이간의 사상에 기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건설노동자를 천하게 보는 것은 먼지 구덩이에서 일하는 그 모습이 비루하게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 가장 비싼 명품은 아파트다. 그 명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건설노동자들이다. 이시다 바이간은 사농공상이라는 귀천의 구별이 형태의 차이, 즉 발현된 것의 차이일 뿐 그 근본의 도는 모두 같다고 했다. 무엇이 귀하고 천한지는 상대적인 관계로서 정해지는 것일 뿐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귀는 천의 희생을 통해 자신이 길러지고 있음을 강조하며 그 희생을 언제나 의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말없이 묵묵히 수고하는 많은 근로자들, 군인들, 공공요원들, 그리고 지식인들 덕분에 세상은 밝게 빛나는 것이다. 
요즘 APT. 라는 노래가 세계적으로 유행한다고 한다. 나도 거기서 일한다.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