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수의 절차탁마] '북송'의 상징 日 니가타 중심에서 '인권'을 외치다

2024-07-31 06:00

[이두수 작가]
기후변동위기가 시작된 거 같다. 하루에도 몇 번씩 비가 내리다 개고를 반복하는데 그 강도가 예사롭지 않다. 폭우와 폭염을 동반하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옥외 작업을 하는 작업자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이런 와중에 프랑스에서 올림픽이 시작되었다. 뭐니 뭐니 해도 올림픽의 아름다움은 경쟁이다. 각 나라를 대표한 선수들은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기량과 기예를 뽐낼 것이다. 이기고 지는 것보다는 참가한 선수들의 현란한 프레젠테이션을 즐기면 좋겠다. 경쟁에서 최고의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최선(最善)을 다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한 그 모습 자체가 금메달감이다. 서전부터 한국 선수들이 좋은 결과를 내고 있어 흐뭇하다.

파리 올림픽 개막식을 보니 프랑스는 역시 상상력이 풍부한 나라라는 것이 확연히 느껴진다. 기존의 경기장 안에서의 공연이 아니라 파리 시내 자체를 공연장으로 활용했다. 프랑스가 문화·예술이 번성한 나라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사실 프랑스는 생각하는 나라이며 각자의 생각을 자유롭게 토론하는 문화를 가진 나라다.

계몽주의는 각자의 생각을 존중하고 이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환경에서 태동한 것이다. 왕이나 성직자 혹은 요즘 말로 셀럽의 말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각자의 독립된 사고체계를 갖춘 사람으로 이러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시민이라는 의식을 갖는 것이다. 이러한 시민들에 의한 새로운 체제를 만든 것이 프랑스혁명이다. 이 계몽주의와 프랑스혁명이 근대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의 독립된 삶과 사고체계를 갖는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내며 산다고 하는 것은 지금도 매우 용기가 필요하고 누군가의 간섭을 받지 않을 만큼의 실력이 필요하다. 아이들에게 독립심을 키워준다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세계관을 정립하고 경제적 자립의 실력을 갖추도록 독려해 주는 것이다.

칠석과 버드나무
지난 7월 7일 일본 니가타시에서 열린 칠석북한인권포럼이라는 국제행사가 열려 뉴코리아피스파운데이션 사무총장 자격으로  참석했다. 재일북송교포 탈북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모두모이자’가 중심이 되어 서해 공무원 피격 관계자들과 연평해전 유족들의 모임인 ‘노스포럼’, 아시아에서 자유, 인권, 통일운동을 벌이는 ‘뉴코리아피스파운데이션’, 북한인권운동을 벌이는 청년대학생들의 모인인 ‘민주주의 허브’ 그리고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피해자 모임인 ‘요코타메구미 동창회’와  니가타시를 인권도시로 만들려는 니가타현 의원과 니가타시 의원들이 참여했다. 주로 북한에 의한 직간접으로 인권피해를 입은 단체들이 니가타세이료(青稜)대학에 모여 북한인권 개선을 위한 토론과 요코타 메구미씨 납치경로와 재일동포들의 북송루트였던 버드나무 거리를 직접 걸었다.

우리나라에선 칠월칠석날이 명절의 의미가 퇴색되었지만 일본에서는 다나바타(七夕) 축제라고 해서 지역마다 매우 의미 있는 명절로 지낸다. 일부러 이 칠석날을 택해 국제포럼을 연 것은 바로 북한에 의한 인권피해자들이 이 칠석날의 의미처럼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게 되었고 언젠가 다시 만날 그날을 고대하기 때문이다.

소를 치는 견우와 베를 짜는 직녀는 일에만 열중하고 결혼할 생각도 없었다고 한다. 이를 딱하게 여긴 옥황상제가 이 둘을 맺어주는데 이 둘은 사랑에 빠져 일을 전혀 하지 않게 되었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상제는 이 둘을 은하수 만큼이나 멀리 떨어뜨려 놓고 1년에 딱 한 번만 만나도록 했다. 이를 불쌍하게 여긴 까마귀와 까치들이 이 둘이 만날 수 있도록 다리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를 오작교라고 하며, 이 둘이 만나는 날이 바로 칠월 칠일 저녁이라는 것이다.

즉 칠석포럼은 언젠가는 이들의 노력을 불쌍히 여겨 하늘이 보우하사 혹은 세계 여론이 움직여 이산가족이 된 이들이 단 하루라도 만날 수 있도록 해 주길 바라며 까치와 까마귀가 모여 다리를 만들었듯이 언젠가는 이들의 목소리에 호응하는 사람들이 기적의 다리를 만들어 줄 것을 고대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모두모이자’를 만든 가와사키 에이코(川崎栄子)씨는 북송사업이 진행된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959년 12월부터 북송사업이 시작되었는데 당시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세계적인 공산화로 인한 일본의 좌경화에 대한 대책이 필요했다. 일본 내에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했고, 그때 북한 김일성은 6·25전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부흥을 위해선 많은 노동인력이 필요했다. 일본과 북한은 서로의 필요성에 의해 재일동포들의 북송사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를 세계 여론과 주변국의 반대를 의식해 적십자를 내세워 인도주의적인 조치로 위장한 것이다.”

재일동포의 북송사업은 1959년에 시작해 1984년까지 25년간 일본 국적자 8600여 명을 포함해 총 9만3346명이 북한으로 송출된 엄청난 국가 간 사업이었다. 

이에 대해 리소라씨는 이렇게 말했다. “1980년대 말까지는 세계적인 냉전체제였고 북한의 실상이 외부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 북한, 그리고 조총련은 수면 하에서 각자의 이해관계로 얽혀 있었고 일본 내 민족차별도 있었고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북송선을 탔다.”  

소련이 해체되고 공산권이 몰락하는 1990년대 상황에서도 한국 대학이나 재야에선 ‘북한 실상 바로 알기’ 캠페인을 벌이며 주체사상을 학습하고 북한을 민족의 주체국가로 떠받들며 북한 체제를 민주기지로 삼아 민주화운동의 이름으로 남한을 사회주의화하려 했다. 남한 사회가 이러했으니 일본에서 조총련의 활동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가와사키 에이코씨는 총련 소속 조선학교 고교 3학년 때 부모님의 만류에도 단신 북한에 갔다고 한다. 당시엔 북한은 세금이 없고 의료, 교육, 주거시설이 무상으로 제공된다고 선전했는데 전쟁이 끝나고 7년도 안 되었는데 어떻게 세계 최고의 나라가 되었는지 직접 가서 확인하고 싶었다고 한다. 북한에 가서 3년 지내다가 돌아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자유롭게 돌아올 수 있다고 해서 사람들은 다시 니가타로 돌아와 가족과 만나자는 의미로 버드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니가타시도 우호의 의미로 시내에서 니가타 항구까지 버드나무로 가로수 길을 만들도록 허락했다. 지금도 이 거리에는 ‘일조우호 거리’라는 빛 바랜 현판이 세워져 있다.

북한에 당도했을 당시 상황에 대해 가와사키씨는 이렇게 말했다.
“청진항에 들어서니 우리를 환영한다고 수많은 군중들이 항구로 모여들었다. 멀리서 볼 땐 환영 인파로 보였는데 배가 항구 가까이 다가가 모인 사람들을 보니 진짜 좀비처럼 보였다. 뼈만 남은 앙상한 몰골에 겨울임에도 얇은 옷 한 벌만 입고 있었다. ‘아 이건 아닌데’ 하는 순간 어디선가 ‘배에서 내리지 말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사람들은 배에서 내리지 않으려고 화장실, 창고 등으로 숨고, 난간을 잡고 발버둥쳤지만 안내원들은 선내를 샅샅이 수색하며 전부 강제로 하선시켰다.
일본에서 온 사람들은 기술자나 배운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사회주의 지상낙원을 만들겠다는 신념에 찬 사람들도 꽤 있었지만 사회적 신분은 ‘복잡군중-동요계층’으로 분류되어 북한 일반사회의 최하층 신분이 되고 말았다. 이 신분의 사람은 현지인과 대화가 불가능하며 당원이나 관리직은 될 수 없다. 실망하여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그러나 자살자는 민족과 당의 반역자라며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게 했다.”

북송 2세로 탈북자인 강봉순씨는 니가타 인권포럼에 3번째 참석했다고 한다. 부모님이 니가타에 살다가 오셨기 때문에 북에서도 니가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오빠는 신분 상승을 위해 당원이 되기로 결심하고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탄광에 들어가 누구보다 땅굴 파기에 앞장섰다고 한다. 생활에 늘 모범을 보이며 최선을 다했지만 출신성분은 어쩔 수 없는 굴레였다고 한다. 본인도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지만 아무리 잘해도 신분의 장애를 뛰어넘을 수 없었다고 한다.
“북한은 외부에서 어떤 제재나 위협을 해도 변하지 않는 체제입니다. 북한에서 인권이란 말은 없어요. 남한에 와서야 인권이란 말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북한 체제 붕괴 없이는 북한 인민 해방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도 사람을 개돼지로 부리는 북한 같은 독재정권은 타도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세계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것입니다.”

니가타를 국제적인 인권도시로 만들자는 노력은 여러 방면서 추진되고 있다. 후카야 시게노부(深谷成信) 시의원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선 신버드나무거리 조성사업을 시작하려고 한다. 기존에 세운 일조우호거리라는 플레이트는 역사적 유물로 존치하고 새롭게 인권의 거리로 명명하고 북한에 의해 피해를 본 세계 여러 피해자들의 증언을 수록한 메모리얼관을 만드는 것이다. 이번에 참가한 유엔 인권사무실과 미국 웜비어재단과 연계하고 아시아북한인권연대를 출범하면 좋지 않겠나 생각한다. 그리고 인권교육과 확산 차원에서 한국과 일본을 포함해 아프리카, 아시아 아이들부터 자유 인권 메시지를 꾸준히 모집해서 전시회를 열고자 한다. 이것은 작지만 큰 울림이 될 것이다. 문제는 일본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곳 니가카에도 북한에 의해 납치된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20명 넘고 전국적으로는 비공식적이지만 200명이 넘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납치문제에 대한 인권조례에 북한에 의한 인권침해에 대한 내용이 없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외무성에 ‘북송일본인 가운데 탈북한 일본인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도 정부는 답변을 모호하게 하고 있다. 북송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권운동을 벌여나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노스포럼의 김기윤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서해 공무원 피습사건을 다루다 보니 의외로 북한에 의해 피해를 본 사람들이 한국만이 아니라 여러 나라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번 기회에 한·미·일 북한인권연대를 만들면 어떨까 생각한다. 인권이 보장되는 북한 사회가 되기 위해선 우선은 남북통일이 가장 빠른 길일 것이다. 아니면 북한의 레짐 체인지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역시 국제사회의 연대로 구체적이고 확실한 제재를 가해야 한다.”

권력자나 실력자의 의도에 끌려 다니지 않고 자기 주도적 삶을 살도록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고 또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개인이 없다면 아무리 정보와 지식을 자유롭게 접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고 해도 오히려 사람들은 지적 탐구와 생각을 하지 않아 알고리즘이라는 패턴에 놀아날 것이다. 권위주의 국가에선 이런 정보 통제로 더욱 교묘하게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 인권은 누가 무상으로 제공하지 않는다. 나의 존엄은 나 스스로 지키고 만들어 가는 것이다.

가오사키씨의 마지막 말이 가슴에 남는다. “나는 북송 탈북자를 동정하자고 이런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북한의 실상을 폭로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일본과 북한에 국가적 책임을 묻기 위해서다. 확실하게 법으로 판단하게 할 것이다. 더 이상 어렵고 슬펐던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 싸워서 승리의 보고를 하고 희망의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자.”
 
[사진설명: 니가타 버드나무 거리를 세계적인 인권의 거리로 만들겠다는 가와사키 에이코씨. 원래 버드나무는 재회의 뜻으로 심는 나무다. 생이별한 탈북 이산가족들, 나아가 분단된 조국이 다시 만나길 기원하는 뜻으로 신버드나무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