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종 칼럼] 이창용 한은 총재의 용기
2024-09-03 06:00
키가 190㎝의 장신인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과거 외국 인사들을 만나면 가끔 재미있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주머니에서 5만원권 지폐를 꺼내 거기에 그려진 신사임당의 모습을 보여주며 자신의 17대 조상이었음을 밝히고 한국의 오랜 역사를 곁들여 설명한다. 이를 통해 분위기가 밝아지면 유창한 영어로 활발한 대화를 이끌어 간다. 과묵하고 신중한 것이 오랫동안 금과옥조였던 한국 중앙은행장 이미지와는 좀 거리가 멀다. 그런 그가 지난주 또 다른 파격을 보여주었다. 한 심포지엄에서 한국의 교육과 부동산 문제를 거론하며 한국 사회의 아픈 면을 꼬집은 것이다.
이는 엄밀히 말하면 물가 안정과 금융 안정을 주 목표로 하는 한국은행이 다룰 문제는 아니다. 특히 지나친 교육열로 인해 서울 강남권으로 인구가 유입되고 이 지역이 부동산 가격 상승의 근원지가 되기 때문에 'SKY' 명문 대학, 즉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교수들이 결단을 내려 지역별 비례 선발제를 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가히 도발적이었다. 과거 한국은행 총재가 금리와 통화의 좁은 테두리만을 고집해서 다뤘던 것에 비하면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 총재의 파격 발언에 대해 아직 정치권이나 교육계에서 직접적인 반응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나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된 상황에서 유쾌할 리는 없을 것이다. 일반의 반응은 좀 엇갈리는 듯하다. 공무원으로서 용기 있는 발언을 했다는 평가도 있는 반면 자신의 지위를 넘은 월권 혹은 만용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총재의 발언이 오늘날 변화하는 세계 금융·경제 상황에서 핵심을 짚은 적확한 주장이었다고 판단한다. 더 이상 중앙은행이 금리와 통화 등 좁은 부분에만 매달리기에는 상황이 너무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스위스의 권위 있는 국제경영개발원은 최근 의미 있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각국의 중앙은행이 몇 가지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는 진단이다. 첫째, 중앙은행의 사명이 과거보다 불분명해졌다는 점이다. 단순한 통화와 물가뿐 아니라 성장, 일자리, 복지, 환경, 산업 등 다양한 사회·정치적 이슈들을 고려할 수밖에 업는 상황이 도래했다. 둘째, 포퓰리즘과 권위주의의 확산으로 갈수록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침해받고 있고 중앙은행장의 역할이 정치화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렇게 이 총재가 다양한 분야에서 의견 개진을 하는 배경에는 점차 확대되는 한국은행의 역할에 기인한다. 즉 2000명에 달하는 최고의 인재를 가진 조직으로서 점차 사회 전반에 걸친 거시적 전략을 연구하는 싱크탱크(think tank)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행은 앞으로도 계속 한국 사회의 다양한 이슈와 문제들에 대해 의견을 개진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정치권 등 많은 분야에서 반대와 견제가 예상된다. 그러나 한국은행으로서 다행스러운 것은 총재 임기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으로 보장된다는 것이다. 다른 공무원 직책과 달리 한국은행 총재는 1998년 이후 모두 4년 임기를 채운 바 있고 바로 전 이주열 총재는 연임에 성공해 8년을 재직한 바 있다. 이 총재는 전임 문재인 대통령 임기 말에 임명되었지만 현 정부에서도 이를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정치 바람을 덜 탈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전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제롬 파월 의장은 최근 미국의 금리 인하가 머지않았다는 신호를 보낸 바 있다. 재선에 도전하고 있는 트럼프 전 대통령과 공화당은 금리 인하가 현 바이든 행정부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주장을 펴며 반대하는 와중에도 9월 중순 한 차례 금리 인하를 단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인플레이션이 어느 정도 통제되는 상황에서 고용 감소 등 경기 하강 조짐이 보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자신이 당선되면 해임할 수 있다고 경고하지만 파월 의장은 정치권의 입김에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다. 같은 모습을 한국은행 총재에게서도 더 보고 싶은 심정이다.
이병종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언론정보학 박사 ▷AP통신 특파원 ▷뉴스위크 한국지국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