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종 칼럼] 구멍뚫린 대미 첩보활동…국정원 왜 이래?
2024-08-04 14:07
한국의 대외 첩보 및 정보 수집을 책임지는 국가정보원은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원훈을 최근 복원했다. 최고 정보기관으로 외부에 자신의 활동이 노출되지 않고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이는 미국의 CIA나 이스라엘의 모사드 등 전 세계 모든 정보기관이 지향하는 바이다. 그러나 오늘의 국정원에서 그런 모습은 전혀 찾을 수가 없다. 최근 미국 검찰에 의해 기소된 한반도 전문가 수미 테리의 사건을 보면 이는 명확하다.
전 CIA 분석가였던 테리는 불법적으로 한국 정부를 위해 일한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미 수사 당국이 밝힌 국정원의 모습은 한마디로 아마추어였다. FBI가 비밀리에 촬영한 흑백 사진에 따르면 국가정보원 요원은 미 정부의 정보를 얻기 위해 백주 대낮에 테리에게 고가 명품 백을 선물하고 최고급 식당에서 대접했다. 대사관 관용차에서 그녀를 만나 정보를 수집했다. 미국 수사 당국이 10년 이상 테리의 행적을 낱낱이 추적해 왔지만 국정원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서투르고 투박한 공작으로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보안을 생명으로 하는 정보기관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정원이 테리 연구원에게 접근해서 첩보 공작을 한 것은 애초부터 잘못된 만남이었다. 과거 CIA뿐 아니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한반도 전문가로 일했고 현재도 권위 있는 미국외교협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 선임연구원으로 있는 테리는 한국 정부로서는 귀중한 자산이다. 뉴욕타임스 등 미국의 유력지에 한반도 관련 칼럼을 자주 기고할 뿐 아니라 CNN 등 뉴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미국의 한국 관련 정책에 대한 조언도 일삼는다. 워싱턴의 윌슨 센터를 통해 한반도 안보에 관한 연구 및 분석도 하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한국 정부는 오래 전부터 그녀를 대미 공공외교 주요 대상으로 삼아 정보 제공 및 기타 지원을 해온 바 있다. 한국 정부의 공공외교 주체인 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을 통해 그녀가 관여된 윌슨 센터에 자금 지원도 한 바 있다. 미국의 여론 지도층인 테리를 통해 미국 여론에 영향을 미쳐 미국 정부의 한반도 정책을 보다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노력이다.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 수행되는 이러한 작업은 공공외교의 기본이 되는 사업으로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가 역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특히 초강대국인 미국의 외교 정책이 중요한 만큼 수도 워싱턴에서는 당연한 외교 활동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파장은 앞으로 오래 지속될 듯하다. 일단 미국의 한국 전문가들이 더 이상 한국 대사관이나 정부 기관과 접촉하고 대화하기를 꺼릴 것이다. 현재 워싱턴에는 한국 정부가 공들이는 소수의 한반도 전문가들이 있는데 이들을 통한 한국의 공공외교 활동이 위축될 것이라는 점이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될 경우 우방을 포함한 외국에 대해 비판적인 그의 태도를 볼 때 한국의 정보 및 로비 활동은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사실 한국 정부는 과거 70년대 유명한 ‘코리아게이트’를 통해 워싱턴 정계를 흔들어 놓으며 신뢰를 잃은 적이 있다. 당시 재미교포 로비스트 박동선은 카터 대통령의 주한 미군 철수를 막기 위해 의회 의원들에게 뇌물을 제공해서 큰 문제를 야기한 바 있다. 그 배후에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있었기에 이는 양국 간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고 다수의 미 의원들이 금품 수수로 처벌을 받았다. 당시 중앙정보부의 비밀 공작이 탄로나 문제는 더욱 확산되었다. 이번에도 국정원이 개입되어 있어서 미국의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국정원으로서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모토를 다시금 되새길 때이다.
이병종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언론정보학 박사 ▷AP통신 특파원 ▷뉴스위크 한국지국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