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노 칼럼] 잠 못 드는 열대야 …'블랙아웃' 위험신호

2024-08-27 06:00

[이학노 동국대 명예교수(국제통상학)]
프랑스 영화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의 주연인 알랭 들롱(Alain Delon)이 세상을 떠났다. 태양이 떠 있는 바닷가에서 유유자적하던 그의 마지막 모습이 영화의 압권이었다. 새삼 오래전 스타였던 프랑스 배우를 들먹이는 이유는 바로 태양이다. 북태평양 고기압과 티베트 고기압 두 개가 겹쳐 만들어진 이중이불로 서울의 열대야가 우리나라 기후관측사상 최장인 30일을 넘어섰다. 게다가 태풍 ‘종다리’의 영향으로 열대야는 더 길어졌다. 이상 고온 때문일까. 전기차 배터리 폭발사고가 잇달아 터졌다. 지구의 생태계가 유지되는 데 꼭 필요한 태양이지만 요즈음은 온 국민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열대야의 잠 못 이루는 밤에 정작 밤을 꼬박 새우는 사람들이 있다. 전력시장과 전력계통의 운영을 담당하는 전력거래소와 전력산업의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의 에너지 담당부서이다. 2011년 9·15 정전 당시 전력예비율은 불과 0.35%. 전력공급이 수요에 미치지 못해 발생하는 대규모 정전, 즉 대정전(Black-out)을 피하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순환정전을 할 수밖에 없었고 산업부 장관과 전력거래소 이사장이 경질되었다. 금년 8월의 최대전력 수요는 97.1Gw(8.20, 17시), 예비율은 8.4%였다. 안정권이라는 예비율 10%에 근접한 수준으로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을 법한데 전력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무슨 까닭에 근심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을까.
 
대정전은 흔히들 공급과 대비한 전력의 초과수요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크게 보면 수요와 공급 간 언밸런스(Unbalance) 때문에 발생한다. 즉, 전력계통 수용능력을 넘는 전력공급도 과부하로 인해 주파수가 정상범위를 벗어나면 발전설비의 고장을 일으켜 정전이 발생할 수 있다. 우선 대정전의 가장 큰 원인인 수요 측면을 보면 데이터센터와 AI 등 신규 기저 수요가 증가한 데 더해서 열대야로 인한 전력수요가 더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전기공급 능력은 8월 최대 전력 기준으로 105.4Gw 수준이다. 요즘처럼 열대야로 전력소비가 폭증하는 경우에는 공급능력을 끌어올려 맞추는 수밖에 없다. 쉬어야 하는 발전기, 정비해야 하는 발전기를 무리해서라도 돌리는 방법밖에 없다.
 
둘째로 공급측면의 문제이다. 전력을 생산할 수 있는 우리나라 전체의 발전설비용량은 149.2Gw이지만 이 중에서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설비용량이 33.2Gw를 차지하고 있다. 태양광은 태양이 뜨는 대낮에, 풍력은 바람이 부는 때에만 발전이 가능하다. 열대야로 잠 못 이루는 한밤중에는 태양광 발전을 할 수 없다. 이에 더해서 발전기는 적정 가동률(설비용량의 3분의 2 수준) 범위 내에서 운용해야 하고 정비도 필요하다. 운동선수가 휴식 없이 100% 힘을 쓰다가는 근육 경련으로 얼마 못 가서 쓰러지기 마련이다.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의 간헐성 완화를 위해 기존 발전기들의 피로도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태양광 발전을 저장하는 에너지저장장치(ESS)가 있지만 생산비가 높고 저장과정에서 손실이 발생하고 기술적인 미비점도 있다. 결국 열대야 등 전력수요가 폭증하는 한밤중에는 재생에너지를 뺀 나머지 발전설비로 감당할 수밖에 없다.
 
셋째로 수요와 공급의 미스매치 문제가 일으키는 송전과 계통의 문제이다. 대규모 전력수요처는 사람이 많은 서울 등 수도권이거나 공장이 많은 지역이다. 반면 전력공급은 원료인 석탄의 수송, 발전설비 냉각 및 운용 문제 등으로 주로 해안지역에 입지하고 있다. 수요지역과 공급지역의 미스매치는 결국 송전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송전선로는 수요와 공급을 원활히 연결하는 데 크게 부족하다. 새로운 송전선로의 건설은 해당지역의 민원과 반대로 건설하기 쉽지 않다. 전력 계통의 문제는 더 있다.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발전량을 송전선에 붙여야 하는데 가느다란 선로에 대규모 전력량을 붙이면 송전선이 감당할 수 없다. 전기차나 휴대폰 배터리도 충전시간이 과도하면 배터리가 견딜 수 없다는 주장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금년 여름 정전 등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지나가고 있지만 만약 정전이 발생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국회 등 정치권은 물론 여론에서 담당자를 문책하라는 목소리가 들끓지 않았을까. 국정조사가 추진되거나 청문회가 열렸을지 모른다. 정작 문제의 본질은 재생에너지를 포용하기 어려운 수요과 공급의 언밸런스, 송전망과 계통의 불안정 때문이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발전설비 역량을 충분히 확보하고 계통 투자를 늘려야 하는데 정치권은 이를 외면하고 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분산전원특별법이 제정되어 2024년 6월 시행되었지만 효과를 보기까지 보완할 점이 많고 시간이 필요한 실정이다. 지난 21대 국회에서 발의되었다가 폐기된 ‘국가기간전력망확충특별법’이 22대 국회에서 재발의되었다. 대정전의 불행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하루빨리 법률로 제정되어야 한다.
 
정치권뿐만 아니라 전기 소비 측면의 자구 노력도 절실하다. 수요관리는 값비싼 신규발전설비를 대체할 수 있다. 소비절약이 이루어질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져야 한다. 과거 단속 대상이던 개문영업이 코로나 팬데믹 이후 다시 되살아난 것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코로나 보건 대책을 포용할 수 있는 에너지절약 대책이 있어야 한다. 소비자들이 시시각각 요금 정보에 따라 소비를 조절할 수 있도록 스마트 그리드 및 계량기의 전면적 활용이 필요하다. 이번에는 전력거래소 등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큰 사고 없이 지나가지만 그렇다고 매년 되풀이될지 모르는 열대야 문제가 제대로 해결된 것으로 볼 사람은 별로 없다.





이학노 필진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텍사스대 오스틴캠퍼스 경제학 박사 △통상교섭민간자문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