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리더십] ② 인류와 사회를 사랑했던 경영철학 '파이낸셜스토리'...혁신적 지표의 明暗
2024-07-30 05:00
2017년 1월 13일 서울 광진구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신입사원과의 대화 행사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성공해서 즐기고 누리는 것은 좋지만 이를 위해 경쟁, 물질, 권력 등에 중독되면 오히려 행복에서 멀어지게 된다. 행복한 성공은 경쟁과 물질 등에 대한 탐닉을 절제하고 사회와 공동체에 기꺼이 성공의 결과물을 나누는 삶을 실천할 때 가능하다”고 사회적 가치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그동안 공식 석상에서 혁신과 생존만을 외쳤지만 이날부터는 거의 모든 공식 석상에서 사회적 가치의 중요성을 전도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 같은 경영철학은 지난 5년간 SK그룹을 이끌어온 ‘파이낸셜 스토리’로 이어졌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이 중요시되는 현대에 최 회장의 파이낸셜 스토리는 글로벌 기업들의 찬사를 받았고, 오랜 기간 SK그룹을 이끄는 기반이 될 것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파이낸셜 스토리 경영은 2020년대에 들어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숫자로 사회적 가치를 측정한다는 아이디어는 획기적이었지만 각 계열사가 오로지 숫자 올리기에 몰두했으며 과도한 경쟁이 발생한다는 부작용이 있었다. 이는 방만한 중복 투자, 재무구조 악화로 이어졌다. 결국 SK그룹은 파이낸셜 스토리의 부작용을 바로 잡기 위한 대규모 조정작업에 돌입해야 했다.
◆기업의 사회적 가치를 숫자로···혁신적 ESG 경영의 탄생
2018년 10월 19일 제주 디아넥스 호텔에서 열린 ‘2018 CEO 세미나’에 참석한 최 회장은 "사회적 가치에 바탕한 비즈니스 모델 혁신에 하루빨리 나서 달라. 사회적 가치는 사회와 고객에게 무한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기반일 뿐 아니라 이제는 경제적 가치 이상으로 기업의 전체 가치를 높일 수 있는 핵심 요소”라며 파이낸셜 스토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파이낸셜 스토리는 기업의 이익 활동뿐 아니라 환경·고용·사회공헌·납세·동반성장 등 다양한 사회적 활동과 경제간접 기여성과를 숫자로 나타낸다는 경영전략을 의미한다. 2017년 이후 최 회장은 어느 경영 성과보다 사회적 가치를 중요시하게 된다.
SK그룹은 2018년부터 그룹의 사회적 가치를 수치화하기 시작했으며 2019년 12월 ‘도쿄포럼 2019’에서 최 회장이 지난해 146억 달러(당시 환율로 약 16조원)의 사회적 가치를 창출했다고 밝히며 그 첫 성과가 공개됐다.
2021년부터 SK그룹은 사회적 가치 창출 규모를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 담아 본격적으로 발표한다. 당시 보고서를 발표한 지주사 겸 투자전문회사 SK(주)는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 사회적 가치 창출액과 함께 ESG 기반의 사업 포트폴리오 변화 목표를 담았다. 친환경에너지, 재활용, 바이오 등에 대한 투자를 강화한다는 것으로 이후 SK는 관련 사업 투자를 본격화한다. 이 같은 움직임은 지주사뿐 아니라 SK스퀘어, SK이노베이션, SK에코플랜트 등 주요 계열사 전반으로 확대된다.
2020년 11조5160억원을 기록한 SK그룹의 사회적 가치는 이듬해 19조1136억원까지 뛰었으며 2022년과 2023년에는 각각 19조6484억원, 16조7534억원을 창출했다
◆사회적 가치를 둔 '동상이몽'···숫자에 매몰된 SK그룹
그룹의 최우선 목표가 사회적 가치 창출로 돌아서면서 계열사들은 여러 사회적 가치 지표 중에서 환경과 사회성과 분야 성장세에 집중했다. 친환경 투자, 치료제 개발, 보안서비스 개발 등 인류에 이롭다는 투자나 개발 성과가 사회적 가치 창출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면서 계열사 간 투자 경쟁이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SK그룹은 2020년에만 신재생에너지, 폐기물 매립 등 사업법인 30개를 설립하고 환경, 에너지 기업 24개를 인수한다. 사회적 가치 창출액이 늘어날 때마다 SK그룹의 연결회사도 증가했다.
사회적 가치 창출액이 7조원가량 폭발적으로 증가한 2021년에는 SK그룹의 연결회사가 한 해에만 159개 증가했으며, 이듬해에도 146개의 연결회사가 추가됐다. 이렇게 증가한 연결회사 수가 2020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391개다.
특히 이 사회적 가치를 각 계열사가 별도로 발표하면서 경영성과 지표로 삼는 문화가 그룹 내에 자리 잡아 계열사 간에 사회적 가치 만들어내기 경쟁이 심화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주요 계열사들의 대규모 중복 투자가 발생한다. 전기차 충전 관련 투자는 SK㈜, SK E&S, SK네트웍스, SK에너지가 각자 방식으로 투자를 진행했으며 관련 자회사도 시그넷, 에버차지, 일렉링크 등 다양하다.
수소 분야에서는 SK E&S와 SK가스가, 친환경 플라스틱 분야에서는 SK지오센트릭과 SK케미칼이 각자 방식으로 자금을 쏟아부었다. 특히 친환경 플라스틱 분야 투자에 있어서는 원천기술 확보를 위한 인수합병(M&A) 및 지분투자가 다수 진행됐다. 동박 분야에서도 SK㈜와 SKC가, 실리콘음극재 분야에서는 SK머티리얼즈와 SKC가 같거나 비슷한 사업을 하고 있다.
반도체와 통신을 담당하는 SK스퀘어에서도 투자 실패 사례가 다수 나타났다. 지난해에만 영업손실 1258억원을 기록한 11번가가 대표적인 사례다. 온라인커머스와 그룹의 동반성장 효과가 전무했을 뿐 아니라 회사 경영 자체도 적자를 면치 못하면서 매각을 시도 중이다. 이 밖에도 가상화폐 투자를 위해 인수한 그린랩스는 투자금 전액을 손실처리했으며, 빗썸메타는 운영을 중단했다. 가상자산거래소 코빗 역시 매각을 진행 중이다.
계열사들의 무리한 투자는 재무제표 악화로 이어졌다. SK이노베이션은 부채액이 약 50조원을 넘어섰으며, 지난 3년간 친환경 분야 투자를 확대한 SK에코플랜트의 올해 1분기 기준 부채비율은 245.3%를 기록하는 등 위험 수준인 200%를 넘겼다. SK스퀘어가 투자한 20여 개 신사업 회사 중 16개 회사가 적자 경영 중이다.
그룹 재무 상태가 급격하게 악화하자 각 계열사의 자율적 의사 결정을 존중했던 최 회장은 결국 ‘리밸런싱’이라는 한 수를 통해 다시 생존과 혁신을 강조하게 됐다.
SK그룹 관계자는 “과거 그룹의 방침은 각 계열사가 스스로 판단해서 성과를 내라는 기조였다”며 “하지만 이번 리밸런싱 작업을 통해 최창원 SK수펙스추구위원회 의장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형태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이번 리밸런싱 작업은 SK이노베이션, SK E&S, SK에코플랜트 등 주력 계열사의 합병을 통해 투자와 의사 결정을 일원화하고, 반도체와 인공지능(AI) 투자라는 그룹 전체 투자 방향성을 정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그룹은 이를 위해 재원 80조원 확보를 목표로 정했는데, 재원 확보가 완료될 때까지는 계열사별 신규 투자는 극히 제한될 것이라고 관계자는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