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낭기의 관점] 美 트럼프 대통령 출마 자격 …시민들이 물었다
·공직 취임권 박탈하느냐 안 하느냐가 쟁점…연방대법원 판결에 관심 집중
미국 공화당의 유력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여러가지 민·형사소송에 휘말려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끄는 소송이 있다. 2020년 대선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선거 결과를 뒤집으려 한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직에 도전하는 것을 막겠다며 미국 시민들이 벌이는 헌법 소송이다. 연방대법원에서 조만간 이 소송의 결론을 내린다. 미국 정계와 법조계는 물론 일반 국민의 눈이 연방대법원이 어떤 판결을 할지에 쏠려 있다. 판결 결과에 따라서는 트럼프가 공직 취임권이 박탈돼 대통령 선거에 나서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지금까지 4가지 사건으로 기소돼 형사 재판을 앞두고 있다. 그 중 두 개는 전직 포르노 배우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숨기기 위해 그 배우에게 입막음성 돈 13만 달러(약 1억7000만원)를 지급하고자 회계 장부를 허위로 작성한 사건, 플로리다주 사저에 백악관 기밀문건을 불법으로 보관하고 돌려주기를 거부한 사건이다. 또 다른 두 개는 2020년 11월 자신이 조 바이든 현 대통령에게 패배한 대선에 불복해 선거 결과를 뒤집으려 한 사건이다. 트럼프는 이 같은 4개의 개별 형사 사건에서 모두 합쳐 무려 91개 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다.
다른 한편에서는 헌법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이 헌법 소송은 트럼프가 유죄냐 무죄를 따지는 다른 재판과는 성격이 다르다. 트럼프가 대통령직을 맡을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재판이다. 미국 수정헌법 제 14조 3항을 트럼프에게 적용해 트럼프의 공직 취임권을 박탈해야 하느냐 아니냐가 재판의 핵심이다. 제 14조3항은 ‘미국 헌법을 지지하기로 선서한 사람이 내란이나 모반에 가담하면 공직을 맡을 수 없다’고 정하고 있다.
2021년 1월 6일 국회의사당 난입 선동 혐의
콜로라도주 대법원은 지난해 12월 19일 이 조항을 적용해 트럼프를 콜로라도주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 명단에서 빼야 한다고 판결했다. 트럼프는 미국 의회가 2020년 11월 치러진 대선에서 현 바이든 대통령이 당선됐음을 확인하기 위해 2021년 1월 6일 회의를 열었을 때 회의를 막으려고 자기 지지자들을 선동하고 부추겨 국회의사당을 습격하도록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총까지 든 시민들이 국회의사당을 습격한 사상 초유의 사건으로 당시 미국은 발칵 뒤집혔다.
이 사건 이후 수정헌법 14조 3항에 따라 트럼프가 대통령직을 맡을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는 소송이 여러 주에서 이어졌다. 이 소송의 핵심 쟁점은 네 가지다. ①트럼프 지지자들이 2020대선 결과의 공식 확인 절차를 중단시키기 위해 의사당에 난입한 것이 ‘반란’인가, ②반란이라면 트럼프가 사전에 지지자들에게 선거 불복 메시지를 던지고, 의사당 난입 사건 당일에는 불복을 독려하는 연설을 하고,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에는 해산을 권고하지 않고 방치한 행위가 ‘반란 가담’인가, ③ 14조3항의 해석과 적용은 정치적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법원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인가, ④14조 3항에서 말하는 ‘공직’에 대통령직도 포함되는가이다.
콜로라도주 하급심은 ①~③항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④항에는 ‘아니다’라고 했다. 취임 자격이 박탈되는 ‘공직’에 대통령직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의 공직 취임 자격을 박탈해 달라는 청원을 기각하는 판결을 했다. 하급심은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14조3항에는 취임 자격이 박탈되는 ‘공직’이 나열돼 있는데 대통령직은 여기에 명문으로 언급돼 있지 않다는 게 첫째 이유였다. 또 하나는 대통령의 취임 선서 내용과 14조3항의 선서 내용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대통령은 취임할 때 헌법을 ‘보존하고 보호하고 방어’할 것을 선서한다. 그런데, 14조 3항은 헌법을 ‘지지’하기로 선서한 사람으로 돼 있기 때문에 대통령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두 가지는 트럼프 변호인들이 재판 과정에서 주장했다. 하급심은 그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콜로라도주 대법원은 대법관 7명 중 4대 3의 다수결로 ④항에 대해서도 ‘그렇다’고 판결했다. 대통령직도 14조3항에서 말하는 취임 자격 박탈 대상 ‘공직’에 해당한다고 했다. 따라서 트럼프는 대통령직을 맡을 수 없기에 선거법에 따라서 콜로라도주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 명단에서 빼야 한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14조3항의 ‘공직’에 대통령직이 특별히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대통령직이 너무나 분명한 공직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다”고 했다. 트럼프의 대통령 자격 박탈에 반대의견을 낸 대법관 3명은 절차상 이유로 그리 했다. 트럼프가 반란에 가담했는지, 14조3항이 대통령직에도 적용되는지 하는 실체적 이유가 아니었다. 이들은 각 주(州)의 법원이 연방의회의 적절한 선행 조치 없이 이런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월권이라고 했다.
'대통령 될 자격 있나' 논란
대통령직이 14조3항에서 말하는 ‘공직’에 해당하는지 아닌지 하는 논란이 벌어진다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없어 보인다. 공직으로 치면 대통령직보다 더 헌법을 지키는 데 모범이 돼야 할 공직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트럼프 변호인들은 대통령직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트럼프를 제소한 측에서는 “14조3항에 적혀 있는 ‘공직’이라는 단어의 평범한 의미에 일부러 눈을 감는 어이없는 주장”이라고 반박한다.
트럼프가 헌법을 ‘보존, 보호, 방어’한다고 선서했지, ‘지지’한다고 선서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더욱 실소를 자아낸다. ‘보존, 보호, 방어’에는 ‘지지’의 의미가 전제돼 있다고 보는 게 상식이다. 지지하지 않고서야 보존, 보호, 방어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트럼프 측은 14조3항 규정대로 ‘지지’한다고 선서하지 않았으니 3항이 대통령직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트럼프 측은 지자자들의 의사당 난입이 ‘반란’이 아니라고도 주장한다. 반란이란 ‘무기를 들고 전쟁을 일으키는 행위’라고 한다. 트럼프를 제소한 측은 ‘선거 결과를 뒤집기 위해 의사당에 총을 들고 난입한 폭동이 어찌 반란이 아니냐’고 반박한다. 콜로라도주 대법원도 판결문에서 “평화로운 권력 이양을 위해 필요한 절차를 진행하는 의회의 행위를 막거나 방해하기 위해 공공연하게 집단적으로 폭력을 사용하거나 사용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은 반란이라고 하기에 충분하다”고 했다.
트럼프는 콜로라도주 대법원 판결을 맹비난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민주당이 오는 11월 대선에서 바이든을 당선시키고 자기를 낙선시키려고 꾸민 책략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공화당 차원의 반발은 없다. 민주당도 조용하다. 판결을 환영한다든지, 트럼프는 즉각 후보 사퇴하라는 주장이 나올 법하지만 그렇지 않다. 뉴욕타임스는 대부분의 민주당원들은 이 소송에 관여하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가 의사당 난입 사건에 가담한 것은 자명하다”라면서도 “트럼프의 대통령직 자격 박탈 여부는 법원 결정에 따를 일”이라고 원론적인 말만 했다. 우리 같으면 재판 결과를 놓고 지지와 반대로 나라가 두 동강이 나고, 법원을 죽여라 살려라 난리를 치고, 여당과 야당은 사필귀정이니, 정치 판결이니 하고 싸우느라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을 일이다.
미국에서는 정치 공방 대신 수정헌법 제14조3항의 해석과 적용을 둘러싼 법률적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조항은 미국이 남북으로 갈려 싸운 남북전쟁(1861~1865년) 직후인 1868년 만들어졌다. 남부 7개 주(州)는 1861년 연방정부인 아메리카합중국(미국)에서 탈퇴해 '남부연합'이라는 별도 정부를 수립하고 남북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1865년 전쟁에서 패배하고 항복했다. 남부연합은 미국 입장에서 보면 반란 세력이다. 미국은 그런 남부연합 출신들이 공직을 맡는 것을 막으려고 수정헌법 14조 3항을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조항은 단 한 번만 적용됐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이 전쟁에 반대해 폭동을 선동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회주의 계열 하원의원을 제명할 때였다. 이처럼 적용된 적이 단 한 번뿐이기에 이 조항의 의미를 두고 논란이 벌어질 일도 없었다. 그런데 트럼프 지지자들이 2021년 1월 6일 의사당에 난입한 사건을 계기로 이 조항이 비로소 현실 문제가 된 것이다. 이 조항의 해석과 적용을 놓고 논쟁이 벌어지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놀라운 일은 미국 민주주의 가장 묵직한 이슈를 다루는 14조3항 관련 헌법 소송이 정당이나 정치인들이 아니라 뜻밖에도 무명의 일반 시민들이나 비영리단체에 의해 제기됐다는 점이다.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현재 미국 50개 주 가운데 최소 35개 주에서 ‘트럼프 대통령직 박탈’을 위한 헌법 소송이 벌어지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이 소송을 낸 사람들이 크게 세 보류라고 보도했다. 존 앤서니 카스트로라는 40세의 텍사스 출신 무명 공화당원, ‘워싱턴의 책임성과 윤리를 위한 시민들’과 ‘인민을 위한 자유 언론’이라는 두 개의 비영리단체, 지역주민들 모임이다.
콜로라도주 대법원 판결은 ‘워싱턴의 책임성과 윤리를 위한 시민들’이 이끌어냈다. 콜로라도주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메인주 국무장관이 이 판결을 근거로 트럼프의 대통령직 자격을 박탈하고 공화당 예비경선 명단에서 트럼프를 삭제한다고 발표했다. 메인주는 법원이 아니라 국무장관이 이런 결정을 하도록 법에 규정돼 있다. 메인주의 결정을 이끌어낸 것은 지역주민들 모임이다.
특이한 사람은 존 앤서니 카스트로이다. 뉴욕타임스는 카스트로가 트럼프를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자 명단에서 빼려고 최소 27개 주의 법원을 드나들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만큼 여러 주에서 소송을 냈다는 말이다. 법학 석사 출신인 카스트로는 “좀 더 잘 알려진 누군가 이 소송에 나서주길 바랐으나 아무도 나서지 않아 혼자서 하기로 했다”고 한다.
‘트럼프 자격 박탈’ 소송은 제기하는 사람에 따라 형식이나 논리가 각양각색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보도했다. 2020년 대선 패배를 뒤집으려 한 트럼프가 과연 다시 대통령직을 맡을 자격이 있는지를 묻고 있다는 점이라고 했다. 선거 불복으로 헌법을 위반한 사람이 헌법 수호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 다시 되도록 내버려 둬도 되느냐고 묻는다는 말이다.
콜로라도주 대법원 판결을 인용할지 파기할지는 연방대법원에 달려 있다. 연방대법원은 지난 8일 트럼프 측과 제소자 측을 불러 질의 응답을 벌였다. 뉴욕타임스는 그 내용으로 볼 때 연방대법관들이 콜로라도주 대법원 판결의 적절성에 회의적인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연방대법원이 콜로라도주 대법원 판결을 파기할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했다. 그러면 트럼프는 대통령 선거에 나설 수 있다.
그러나 연방대법원 판결 결과에 관계 없이 이번 헌법 소송은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대통령 선거 결과에 불복한 사람이 다시 대통령직에 도전하는 것을 바라만 볼 수는 없다는 문제 의식이 표출됐다. 그 문제를 집회나 시위 또는 정치 공세 같은 비법률적 방법이 아니라 헌법에 따라 해결하려고 했다. 헌법 소송으로 이끈 주역이 정당이나 정치인이 아닌 일반시민들이다. ‘죽어 있던’ 헌법 조항을 끄집어 내 민주주의와 헌법에 관한 쟁점들에 대해 무엇이 적절한지 국가적으로 토론하고 있다. 이런 게 미국의 힘이 아닐까.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정치학과ㆍ 대학원 정치학 석사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본부장 ▶원주 한라대 특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