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자 보호법이라는데…콘텐츠업계는 왜 '검정고무신 방지법' 반대할까

2023-11-22 06:00
문화산업공정유통법, 연내 국회 통과 가능성↑
법 통과 시 불확실성 확대…업계 우려 확산

지난 8월 18일 서울 노원구 경춘선숲길갤러리에서 열린 이우영 작가 추모 특별기획전 '이우영 1972 - 2023 : 매일, 내 일 검정고무신'에서 관람객이 원화를 살펴보고 있다. 1990년대 인기 만화 '검정고무신' 저작권 관련 분쟁 도중 세상을 등진 고(故) 이우영 작가의 일생을 재조명하는 전시다. [사진=연합뉴스]

'문화산업의 공정한 유통환경 조성에 관한 법률 제정안(문화산업공정유통법)'의 연내 국회 통과가 유력하다. 지난 3월 '검정고무신' 이우영 작가의 극단적 선택을 계기로 급물살을 타면서 '검정고무신 방지법'으로도 불리는 법안이다.

다만 여전히 법안에 대한 콘텐츠업계와 창작자들 간 온도차는 상당하다. 창작자단체에선 조속한 법안 통과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반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 등 콘텐츠업계는 법안에 큰 우려를 표하고 있다.

검정고무신 방지법이라는 별칭에서 알 수 있듯 문화산업공정유통법은 창작자들이 처한 다양한 불공정 행위에서 이들을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법이다. 콘텐츠업계에서도 창작자들에게 공정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대전제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법안 자체에 짚어봐야 할 부분이 많은 데다, 법 시행 시 규제에 따른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어 재고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문산법, 연말 국회 통과 앞둬
22일 업계에 따르면 검정고무신 방지법으로 불리는 문화산업공정유통법이 올해 중 통과될 것으로 보인다. 이 법안은 지난 2020년 12월 유정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과 2022년 11월 김승수 국민의힘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을 통틀어 일컫는다. 다음 달 열릴 예정인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문체위) 전체회의 안건에 오를 것으로 예상되는데, 큰 이변이 없는 한 상임위 통과가 유력하다.

두 법안 모두 각종 불공정 행위를 금지 행위로 정하고, 이를 위반한 사업자에 대해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 장관이 시정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이행강제금과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다. 

금지 행위는 △문화상품 납품 후 수정·보완을 요구하면서 그 비용을 보상하지 않는 행위 △문화상품 관련 기술자료·정보 제공을 강요하는 행위 △지식재산권(지재권) 양도를 강제하거나 무상으로 양수하는 행위 또는 통상적인 거래관행에 비춰 현저히 낮은 수준으로 지재권 사용 수익을 분배하는 행위 △판매 촉진에 소요되는 비용 또는 합의되지 않은 가격 할인으로 인한 비용 등을 콘텐츠 제작자에게 부담시키는 행위 △제작 방향 변경·지정·교체 등 제작업자의 제작 활동을 방해하는 행위 △통상적으로 지급되는 대가보다 현저히 낮은 수준으로 대가를 정하거나 공급계약에 명시된 대가를 정당한 이유 없이 감액하는 행위 등이다.
 
강정원 문화체육관광부 대변인이 지난 7월 17일 오전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정례브리핑에서 검정 고무신 사건 특별조사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들 법안은 지난 3월 29일 문체위 전체회의에서 통과됐지만, 이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정통부)와 방송통신위원회가 '중복 규제' 우려로 법안에 반대 의견을 제출하면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에서 반려됐다.

문화산업공정유통법 규제 범위에는 출판·만화뿐 아니라 방송영상물·음악·게임 등과 관련된 산업도 포함된다. 과기정통부와 방통위는 이미 방송법과 IPTV법, 전기통신사업법 등으로 방송영상물 사업자들이 금지행위 규제를 받고 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이는 OTT 플랫폼 등 유통사업자들에 대한 규제 권한이 문체부로 넘어가는 것을 우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창작자 단체들은 법안의 조속한 통과를 요구하고 있다. 현행법으로는 창작자들이 처한 여러 불공정 계약을 효과적으로 예방할 수 없는 만큼 종합적인 대책 마련 차원에서 법이 필요하다는 취지다.

문체부도 입법 의지가 강하다. 유인촌 문체부 장관은 지난 14일 '영상산업 도약 전략'을 발표하면서 문화산업 공정유통법을 제정하겠다고 강조했다. 콘텐츠 산업 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불공정 행위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효성 없고 부작용만 클 것"
콘텐츠업계와 학계 등에서는 해당 법안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지속해서 내고 있다. 이미 공정거래법·문화산업진흥기본법 등으로 각종 불공정 행위에 대한 규정들을 두고 있는 데다, 추가적인 규제로 불확실성이 커질 수 있어서다.

지난 15일 열린 '디지털 심화 시대, 콘텐츠산업 생태계의 지속가능한 발전 정책: 문화산업공정유통법안, 이대로 좋은가' 토론회에서는 학계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해당 법안에 대한 여러 우려가 나왔다. 우선 중복규제 문제다. 이승민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교수는 "법안에서 금지행위로 규정한 '창작자 제작 활동 방해'는 주로 방송산업에서 발생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방통위 소관 사무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기술정보·지재권 양도 강제 등은 전형적인 불공정 거래 행위로서 공정거래법 적용 대상"이라고 짚었다.

법안을 통해 실제 '검정고무신 사태'를 방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지적도 제기됐다. 오병철 연세대 로스쿨 교수는 "검정고무신 사태는 작가와 제작사 간의 관계에 따른 사건이지만, 이 법안은 주로 제작업자와 유통업자 간 관계를 다루고 있어 사실상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두 법안 모두 공통적으로 법의 적용 대상을 문화상품제작업자와 문화상품유통업자로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서 문화상품제작업자란 창작·실연·개발·생산 등으로 유·무형 문화상품을 제작·기획하는 개인·단체·법인·투자조합 등을 의미한다.

유통사업자의 작품 투자가 위축될 수 있다는 의견도 내놨다. 오 교수는 "문화상품은 성공 여부가 매우 불분명하고 불투명해 대가를 어떻게 나눌지 판단하는 게 매우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저작권자 배분이 높게 이뤄져야 공정하다고 생각된다면, 유통·제작업자 입장에선 시장 검증이 되지 않은 신인에게 높은 비율을 주고 문화 상품을 받아오려 하지 않을 것"이라며 "결국 무명의 신진 작가들은 시장에 진입하기 매우 어려워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콘텐츠업계에서 가장 우려하는 점도 이 지점이다. 통상 투자 과정에선 작품이 실패할 경우에 대한 위험도 짊어져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법안이 통과되면 투자에 따른 부담이 커져 과감한 투자에 더 조심스러워지고, 결국 흥행 가능성이 큰 유명 작가와 제작사 작품에 투자가 집중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업계와 학계에서는 창작자 권리와 업체의 사업적 측면 사이에 벌어져 있는 간극을 좁히기 위한 숙의가 좀 더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문화산업공정유통법은 현재 국무조정실 주재로 문체부와 방통위에서 세부 내용에 대한 막바지 논의를 진행 중이다. 기존 방통위 관할 법들과의 중복 우려를 줄이기 위한 방향으로 논의가 이뤄지는 것으로 예상되는데, 아직 최종안은 나오지 않았다. 문체부 관계자는 "부처 간 입장이 있는 부분들을 조율해서 최종적으로 정부안을 확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안이 확정되면 연내 문체위 법안소위와 전체회의가 잇따라 열려, 해당 법안을 처리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