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선 칼럼] '정치인' 이라는 직업에서 사표를 내라

2023-09-14 05:28

[유창선 시사평론가]


“국민항쟁을 시작하겠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8월 31일 단식투쟁에 들어가면서 했던 말이다. 이 대표는 “사즉생의 각오로 민주주의 파괴를 막아내겠다”면서 “마지막 수단으로 오늘부터 무기한 단식을 시작한다”고 했다. ‘항쟁’이라는 말을 오랜만에 들었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7년에 ‘호헌 철폐-독재타도’를 외치며 일어났던 것이 6월 ’항쟁’이었다. 항쟁이라는 단어는 폭력을 휘두르는 권력에 맞서 싸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폭력적인 권력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니 국회나 정당 같은 제도의 틀을 벗어나 거리에서의 투쟁을 불사하며 싸운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현 정부에 대한 이 대표의 인식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국회 차원에서의 투쟁이 아니라 장내와 장외를 망라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그런데 항쟁에서는 정치가 역할을 할 일은 거의 없다. 정치란 본래 싸움을 조정하고 말리는 것이니, 항쟁을 하겠다는 것은 정치를 멈추겠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싸움 얘기는 윤석열 대통령도 이미 꺼냈다. 윤 대통령은 8월 29일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한 국무위원들에게 “여러분은 정무적 정치인이기 때문에 말로 싸우라고 그 자리에 계신 것”이라면서 “여야 스펙트럼의 간극이 너무 넓으면 점잖게 얘기한다고 되지 않는다. ‘전사’가 돼야 한다”며 적극적으로 싸우라고 독려한 것으로 전해졌다. 물론 윤 대통령이 싸우라는 것은 이 대표처럼 ‘항쟁’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논리와 말’을 갖고 적극 대응하라는 의미였다. 실제로 윤 대통령의 주문이 있은 뒤로 국회에 출석해서 야당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는 국무위원들의 태도가 전투적인 모습으로 바뀌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그동안 국회에서 점잖게 답변하고 했던 국무위원들까지도 고성으로 대응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야당 의원들의 거칠은 고성에, 국무위원들도 밀리지 않고 강하게 받아치니 국회 회의장에서 정치는 사라지고 말싸움만 이어지게 된다.

최근 있었던 이런 광경들은 정치가 사라져버린 우리 정치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30년 이상의 세월 동안 정치평론을 하면서 우리 정치를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권위주의 권력을 겪기도 했고 3김정치의 빛과 그늘을 함께 보기도 했다. 민주화가 된 이후로는 진보와 보수 정치세력 간의 대결과 격해진 갈등도 보게 되었다. 다양한 정치시대를 거쳐왔지만 공통적인 것은 어떤 시절에나 정치는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과거 우리 정치사의 극단적인 대결의 시대 속에서도 정치의 역할은 컸다. 여야가 격렬하게 싸우다가도 막후에서의 대화와 협상을 통해 얼어붙은 정국을 녹이고 갈등 사안들을 일괄 타결하여 매듭짓는 정치가 작동했다. 그래서 다시는 안 볼 것처럼 한창 싸우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손잡고 사진 찍으면서 국면을 전환시키는 정치를 과거의 정치인들은 보여주었다. 그래서 정치는 예술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정치가 전쟁이 되었다. 여야가 선악의 이분법에 갇혀버리니 상대는 궤멸시켜야 할 악이고, 우리는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선한 세력이다. 상대는 악마니까 오직 패퇴시켜 제압하는 것만 필요할 뿐, 그들을 인정하며 서로 주고받는 협상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다.

이재명 대표의 단식투쟁을 지지하며 함께하는 민주당은 그동안 이 대표 개인을 지키기 위한 ‘방탄’ 이외에 무엇을 했는지 떠오르는 것이 없다. 민주당은 이미 국회에서 체포동의안을 부결시켰고, 그 뒤로 이 대표가 불체포특권 포기를 선언했지만 이 대표 구속영장에 대한 최종 결말이 어떻게 날지는 아직 지켜볼 일이다. 분명한 것은 민주당이 내내 ‘이재명 사법리스크’에 갇혀버려 제1야당으로서 해야할 정치적 역할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민주당은 국회에서는 여전히 절대 다수의 의석을 갖고 있는 힘센 야당이다. 오늘과 같은 극한적 정치 상황의 책임을 집권세력에게만 돌리기에는 민주당은 여전히 막강한 정당이다. 돌아보면 지난 대선 이래로 극한적인 대결 정국이 계속된 데는 민주당의 선제공격의 책임도 컸다. 대선 결과를 인정하지 않은 채 곧바로 ‘검수완박’ 입법을 밀어붙이고 ‘김건희 특별법’을 발의하는 등 극단적 대결정치를 민주당은 고집했다. 민주당 내에서 그래도 정치를 아는 중진들은 ‘개딸’들의 문자폭탄에 눌려 입을 열지 못하고, ‘처럼회’ 같은 강성 초선 의원들이 당의 진로를 쥐락펴락 하면서 빚어졌던 일들이다.

지금 민주당을 보면 투쟁에 능하다고 자부하는 정치인들은 차고 넘치지만, 정치를 아는 정치인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정치를 할 생각을 거둬들인 듯한 여당의 모습도 실망스럽다. 아무리 대통령이 강경 드라이브를 건다 해도, 여당은 야당을 상대하며 정치를 해야 정국이 안정되고 국정도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다. 그런데 지금 국민의힘은 민주당의 이재명 대표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다. 이번 이 대표의 단식에 대한 국민의힘 측의 태도도 그러하다. 물론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아직까지 한 번도 이 대표와 회담을 갖지 않았다. 전례가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한덕수 국무총리가 국회에서 답변한 대로 ‘이재명 사법리스크’에 대한 고려라는 점에서 일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윤 대통령이 이 대표를 따로 만날 경우 사법적인 문제에 대한 어떤 신호로 해석될 수 있는 면이 조심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정치를 하는 국민의힘은 다르다. 이재명이라는 정치인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여당이 상대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제1야당 대표인 것이다. 그렇다면 제1야당 대표가 오랜 기간 단식을 해서 저 지경이 되었으면 국민의힘 지도부가 방문해서 건강도 걱정해주고 단식 중단도 권유하는 것이 정상적인 광경이다. 그럼에도 국민의힘에서는 ‘출퇴근 단식 쇼’라는 조롱만 나올 뿐, 야당에 대한 존중의 흔적 같은 것은 ‘쇼’라도 보이지 않는다. 

여당도 야당도 정치에는 별로 의지가 없어 보이는 시절이다. 정치를 통해 무엇을 협상하고 절충하고 해결할 의사는 없고, 오직 상대를 무너뜨리는 데만 다들 관심이 가 있는 모습이다. 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정작 정치에 관심이 없다. 그렇다면 다들 정치라는 직업에서 사표를 내는 것이 바른 선택이 아니겠는가. 사라져버린 정치를 국민들은 어디 가서 찾아야 할까 모르겠다.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대학원 사회학 박사 ▷전 경희대 사이버대학교 NGO학과 외래교수 ▷전 한림대 사회학과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