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준의 지피지기] 과학 없는 진보 없고, 과학 없는 좌파 없다

2023-07-19 06:00
덩샤오핑 시대 중국의 경제발전은 과학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다

[박승준 논설주간]



“과학기술이 제1의 생산력입니다.”
1978년 9월 26일 중국공산당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이 한 말이다. 그보다 2년 전인 1976년 9월 마오쩌둥(毛澤東)이 죽은 다음 전국의 과학자들을 모아 개최한 ‘전국과학대회’에 나가서 연설하면서 강조한 말이다. 그의 말은 이어진다.
“…과학기술이 제1의 생산력이라는 말은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입니다.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은 과학과 생산의 관계를 더욱 가깝게 만들었습니다. 과학기술이 생산력에 미치는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
덩샤오핑은 1988년 9월 5일 베이징(北京)으로 찾아온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구스타우 후사크를 만났을 때도 이 말을 강조했다. 그해 9월 12일 중국공산당 중앙당 간부들에게도 강조했다. “교육 과정에서도 과학기술이 제1의 생산력이라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 덩샤오핑은 1992년 2월 남쪽의 경제개발특구를 시찰하면서도 “과학기술이 제1의 생산력이며, 과학기술이 발전해야 산업의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세계은행(World Bank)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마오쩌둥이 죽은 1976년 중국의 GDP는 1539억4000만 달러(현재 가치)였고, 1인당 GDP는 153.94달러였다. 그때 우리 GDP는 299억 달러, 1인당 GDP는 834.1달러였다. 당시 중국의 GDP는 우리의 5배 정도, 1인당 GDP는 우리의 5분의 1 수준이었다. 그러던 것이 덩샤오핑이 리드하는 중국의 경제발전이 진행된 첫 10년 이후인 1990년 중국의 GDP는 3608억6000만 달러, 1인당 GDP는 317.9달러였다. 우리 GDP는 2833억7000만 달러, 1인당 GDP는 6610달러였다. 중국 GDP는 우리의 1.3배, 1인당 GDP는 우리의 20분의 1 정도였다.
과학기술을 강조하는 덩샤오핑 방식의 개혁개방과 빠른 경제발전의 두 번째 10년이 흐른 다음인 2000년 중국의 GDP는 1.21조(兆) 달러, 1인당 GDP는 959.4달러로 늘었다. 이때 우리의 GDP는 5761억8000만 달러, 1인당 GDP는 1만2257달러였다. 중국 GDP는 우리의 2배, 1인당 GDP는 13분의 1로 그 간격이 좁혀졌다. 2020년 중국 GDP는 14.69조 달러, 1인당 GDP는 1만408.7달러로, 우리 GDP 1.64조 달러의 9배 정도로 확대됐고, 1인당 GDP는 우리의 3만1721.3달러의 3분의 1 정도로 간격이 줄었다.
물론 덩샤오핑 식의 개혁개방 40여 년간 중국의 빠른 경제발전이 전적으로 덩샤오핑의 과학기술 강조에만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고, 덩샤오핑의 전임자 마오쩌둥도 실천하지는 않았지만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했다. 마오쩌둥은 강철 생산량을 단숨에 영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군중주의에 의존하기 위해 대약진운동을 벌이면서 마을마다 어설픈 용광로를 설치해서 지식인들의 웃음을 샀고, 식량 생산량을 늘리겠다고 밀과 벼를 촘촘히 심는 밀식(密植)을 지시했다가 바람이 안 통해 뿌리가 썩어 대기근을 초래한 뒤 반대하는 류샤오치(劉少奇)를 처형하는 비과학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주었다.
그런 마오도 말로는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1966년에 시작해서 10년간 계속된 문화혁명 기간에도 ‘마오쩌둥 어록’을 통해 “과학기술 없이는 생산력을 높일 방법이 없다(不搞科學技術, 生産力無法提高)”라고 강조했다. 마오는 ‘자연변증법 연구통신’이라는 잡지에 기고한 “혁명정신과 엄격한 과학적 태도”라는 글에서는 이런 말도 했다.
“과거 우리가 인민정부, 인민군대라는 상부구조를 건설한 이유는 무엇인가. 상부구조를 건설한 이유는 생산을 위한 것이며, 생산력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이 필수요소이며, 과학기술 없이 생산력을 높이는 방법은 없다.”
중국공산당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원조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도 자신들이 추구하는 사회주의를 이전의 공상적(空想的) 사회주의와 구분해서 과학적 사회주의(Scientific Socialism)임을 강조했다. 이들은 ‘공산당선언’, ‘자본론’, ‘유겐 뒤링의 과학적 혁명론’ 등을 통해 자신들이 추구하는 사회주의가 과학적 이론에 근거한 과학적 사회주의임을 강조했다. 이들은 과학적 사회주의를 “인류 문명이 이뤄놓은 결정체(結晶體)”라고 강조하면서 “과학적 사회주의야말로 사회주의의 본질이며, 특징으로 인류사회가 만들어낸 발전이론의 최신 성과”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그러면서 “종교는 과학이 아니며, 종교에 대한 열광(熱狂)이 사회의 발전을 이룰 수는 없다”고 자본주의의 근본이 종교에서 출발했음을 비판했다.
필자가 베이징(北京) 주재 신문사 특파원으로 일하던 1997년 2월에 세상을 떠난 덩샤오핑의 죽음은 자본주의자인 필자에게 적지 않은 감동을 주었다. 덩샤오핑은 죽기 전 가족들에게 “사고행위가 끝난 사회주의자의 신체는 아무 쓸모가 없으니 태워서 바다에 뿌리고 어떤 기념관도 짓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평생 과학적 사회주의와 유물론(唯物論)을 추구해온 덩샤오핑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는 베이징 서쪽 바바오산(八寶山) 화장터에서 화장돼 비행기에 실려 동중국해에 뿌려졌고, 그의 유언에 따라 중국 어디에도 그의 기념관은 건립되지 않았다. 중국공산당원들이 “위대한 무산계급 혁명가”로 추앙하는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의 부인 덩잉차오 역시 1992년 7월에 세상을 떠나면서 “평생 동지였던 남편 언라이가 그랬듯이 사고행위가 끝난 사회주의자의 신체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므로 태워서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유언은 실행됐다. 물론 이들과는 달리 1976년 9월에 사망한 마오는 그런 유언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베이징 한복판 천안문 광장 중심부에 있는 마오쩌둥 기념관 지하에 파라핀 처리가 되어 보관돼 하루에 한 번씩 땅위로 끌어올려져 인민들에게 구경당하는 형벌 아닌 형벌을 받고 있다.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로 이른바 우리의 진보좌파 진영과 보수우파 진영이 대립 갈등하는 우리 정치를 지켜보면서 솔직히 당혹스러웠다. 이른바 진보좌파 진영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영국 옥스퍼드대 물리학 명예교수(Emeritus Professor) 웨이드 앨리슨(82)을 ‘돌팔이’라고 비난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보고서를 ‘깡통 보고서’라고 비난하는 지점이 당혹스러웠다. 진보좌파 진영이라면 당연히 과학을 무기로 논전을 전개해야 하고, 보수우파 진영은 종교적이고 전통적인 관념을 바탕으로 논전을 전개할 것으로 보았는데 그런 예상이 완전히 뒤집어져 당혹스러웠다.
‘과학’이라는 용어는 영어의 ‘science’를 일본사람들이 18~19세기에 한자로 ‘科學’이라고 번역해서 중국으로 역수출한 용어다. ‘science’라는 영어의 원래 뜻은 ‘물리학적 세계의 구조와 움직임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케임브리지 사전에 정의돼있다. 한자의 형성과정을 연구해서 만들어진 한나라 허신(許愼)이 남긴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과학의 과(科)라는 글자가 “벼 화(禾)와 말 두(斗)가 결합되어 곡식의 양을 측정한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글자라고 나와 있다.
영어 science를 과학(科學)이라고 번역한 일본산 한자용어가 중국으로 수입되기 전 19세기 중국 지식인들은 science를 ‘싸이선생(賽先生)’이라고 음역해서 사용했다. 기술을 가리키는 테크놀로지(technology)는 ‘터선생(特先生)’이라고 음역했다. 1840년 영국과 청나라가 벌인 아편전쟁에서 청왕조가 패배하고 중국이 서양의 반식민지가 되자 중국 지식인들은 그 이유를 “서양에는 싸이선생과 터선생이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없었다”고 진단했다. 변법자강(變法自强)을 주장한 캉유웨이(康有爲)와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식인과 혁명가들은 “산업혁명을 한 영국과 유럽에는 앞선 과학기술이 있었지만 중국에는 과학기술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 시대를 지나면서 과학기술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고 판단한 덩샤오핑은 1980년 개혁개방을 시작하면서 베이징 시내 한복판에 ‘싸이터(賽特‧사이언스 테크놀로지)’백화점을 만들게 했고, 전국에는 ‘싸이터’ 이름이 붙은 빌딩들이 들어섰다. 과학과 기술이 뒤떨어져 서양 제국주의의 반식민지로 전락한 청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과학이야말로 중세 종교의 세기를 넘어서 인류가 만들어낸 최신의 사고 수단과 분석의 틀이라는 것이 중국공산당 개혁개방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상식이다. 과학을 부정하고 과학자를 비난하는 우리의 진보좌파는 과연 과학을 넘어 어디로 가려고 하는 것일까.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현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 ▷호서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