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준의 지피지기] 중국 내정간섭 DNA
2023-06-23 14:39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anuk). 캄보디아 근대사에서 가장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1922년 10월에 출생해서 90년을 살고 2012년 10월에 사망했다. 그의 일생은 태평양 전쟁으로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를 점령했던 일본의 시각으로 볼 수도 있고, 1887년부터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통치하던 프랑스의 입장에서 볼 수도 있으며, 1970년 론 놀 정권을 세워 시아누크를 실각시켰던 미국의 시각에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1979년 캄보디아를 침공했던 베트남을 비롯한 인도차이나 반도 이웃 나라들의 입장에서 볼 수도 있다. 여기서는 1970년 론 놀 정권 수립으로 소련 수도 모스크바 여행 중에 실각한 그의 망명을 받아들인 중국의 시각에서 보기로 하자.
1970년 3월 18일 미국이 획책한 론 놀 정권의 쿠데타로 국왕 자리에서 폐위된 시아누크는 프랑스 방문을 마치고, 소련 모스크바를 방문하던 중에 프놈펜으로 돌아갈 길이 막혔다. 당초 프랑스, 소련, 중국 3개국 순방을 떠난 길이었으므로 일단 베이징(北京)까지는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 지도자들에게 폐위 소식을 들은 시아누크는 모스크바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갈 곳이 없어진 신세를 생각하며 대성통곡을 했다. 3월 19일 오전 베이징 서우두(首都)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린 시아누크를 기다리고 있던 인물은 놀랍게도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였다. 중국공산당 정치국원 예젠잉(葉劍英)과 리셴녠(李先念)도 나와 기다리고 있었고, 중국 외교부 초청으로 베이징에 주재하는 46개국 대사들도 공항에 나와 있었다.
“시아누크 국왕의 방문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국왕께서는 여전히 캄보디아의 국가원수이십니다. 우리는 영원히 국왕이심을 승인합니다.”
저우언라이 총리의 그런 말로 시작된 환영의식을 본 시아누크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우언라이와 두 차례 회담을 한 시아누크는 이렇게 말했다.
국가주석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 총리의 배려로, 시아누크와 부인은 9개월간 베이징 국빈관 댜오위타이(釣魚臺)에 장기 투숙할 수 있었다. 1970년 12월 시아누크는 거처를 베이징 시내 한복판 톈안먼 광장 바로 동쪽의 둥자오민샹(東郊民巷) 13호에 독립가옥을 마련해서 이사했다. 시아누크가 입주하는 날에는 저우언라이 총리 부부가 찾아와 축하해 주었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건물 이름을 캄보디아 국가원수부(元首府)로 정했다”는 말도 했다. 시아누크는 이런 답례의 말을 했다.
“내가 중국에 장기 체류하게 된 원인은 중국이 미국의 캄보디아 침략에 반대하는 우리를 지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위대한 영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총리를 우리의 좋은 친구로 존중합니다.”
시아누크는 국빈관 댜오위타이와 이 독립가옥에서 1975년 4월까지 5년 넘게 거주했다. 중국 외교부 당국은 저우언라이 총리 지시에 따라 베이징에 머무는 시아누크가 답답해 할 때는 평양을 방문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서우두 공항을 오갈 때는 빨간 카펫을 깔아주는 등 국가원수에게 하는 예우를 다해서 모셨다. 이후 캄보디아에는 베트남의 침공, 크메르루주 정권 수립, 헹 삼린 정권 수립 등 혼란이 이어졌고, 1988년 7월 1일 중국 외교부는 ‘캄보디아 문제 해결을 위한 4개 항의 제의’를 담은 성명을 발표했다. 이 4개 항의 핵심 내용은 “베트남 철군 이후 캄보디아에는 시아누크를 중심으로 하는 4개 정파의 연합정부가 탄생하기를 희망한다”는 부분이었다.
1996년 3월 23일 대만에서는 대만이 일본 식민지에서 벗어난 뒤 50년 만에 처음으로 총통 직접선거가 실시될 예정이었다. 총통 직접선거에는 국민당에서 리덩후이(李登輝) 후보가 출마하고, 대만 독립을 공개 주장하는 민주진보당에서 펑밍민(彭明敏) 후보가 출마했다. 총통 직접선거를 15일 앞둔 3월 8일 중국 인민해방군은 대만 부근 해역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해서 대만은 물론 미국과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미사일은 3월 13일까지 모두 4발 발사됐고 중국군은 관영 중앙TV와 신화통신을 통해 “미리 고지한 4개의 해상 좌표에 명중했다”고 발표했다. 중국군은 사전에 “4개의 좌표 부근 해역에 선박과 항공기의 통행을 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3월 15일에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18일부터 25일까지 대만해협 중북부 해역에서 육·해·공 합동훈련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신화통신은 “훈련 실시 해역이 북위 25도 50분·동경 119도 50분, 북위 25도 30분·동경 120도 24분, 북위 25도 12분·동경 119도 26분, 북위 24도 54분·동경 119도 56분의 4각형 해역”이라고 타전했다. 중국 관영 중앙TV는 방영한 도면을 통해 핑탄(平潭)도를 적시함으로써 이 훈련이 지난 8∼15일 실시된 미사일 발사훈련과 지난 12∼15일 실시한 해·공군 합동 실탄훈련에 이은 상륙 훈련이 대만 상륙을 가상한 핑탄도 훈련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1882년 조선에서 보수파로 분류할 수 있는 흥선대원군을 대표적인 배경 세력으로 한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청나라는 군대를 파견해서 흥선대원군을 톈진(天津)으로 납치해감으로써 사태를 진압했다. 당시 작전을 주도한 청나라 군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25세의 위안스카이(袁世凱)였다고 우리 근세사는 기록하고 있다. 청은 1876년 일본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조선이 대원군의 며느리 민씨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개화파가 조선 정치를 주도하는 상황을 관찰하고 있다가 임오군란이 나자 군대를 파병한 것이다. 청이 조선에 파병한 군대의 일원이었던 젊은 위안스카이는 대원군을 톈진으로 납치하는 작전을 성공시킴으로써 이후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노골화했다. 위안스카이는 조선에서 출세하기 시작해서 나중에 중화제국 황제에까지 오르는 영광을 누렸다.
지난 6월 8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관저로 초청해서 만난 자리에서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가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한국 일각이 미국의 승리에 베팅한 것은 잘못된 판단이며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상황은 우리 정치가 대단히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을 중국의 인근 국가에 대한 내정간섭 역사에서 알 수 있다. 평소에 한국어 실력을 과시하며 준비된 원고 없이 즉석 연설하는 모습을 보여주던 싱하이밍 대사가 A4용지에 준비한 원고를 또박또박 읽어내려갔다는 것은 그 원고를 싱하이밍 대사 본인이 준비한 것은 아니라는 합리적인 추측이 가능하다. 한국어 발음을 별로 틀리지 않게 하는 싱하이밍 대사는 ‘베팅’이라는 용어는 발음도 제대로 못한 점을 보면 그 원고가 베이징 외교당국이 준비해서 보내준 원고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이날 원고를 낭독한 후 이어진 비공개 대화에서 싱하이밍 대사는 이재명 대표에게 무슨 말을 한 것일까.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여당 측은 싱하이밍 대사의 행동에서 위안스카이 이름을 소환해서 비난했지만 상황은 그보다 더 심각하고 위험해진 게 아닐까. 이번에는 중국 외교부가 싱하이밍 대사의 입과 A4용지 원고를 통해 한·미 동맹으로 기울어지는 한국 정부에 경고했지만 만약에 중국 외교부가 공식 성명을 통해 “우리 중화인민공화국은 한·미 동맹으로 기울어진 윤석열 대통령 정부를 신뢰하지 않으며, 대중국 외교와 조선과의 평화를 중요시하는 이재명 대표를 중심으로 하는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는 날이 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그런 날이 금방 오지는 않겠지만 국외 여행 중에 망명한 시아누크를 5년간 잘 모시다가 캄보디아로 귀국한 뒤 “우리 중국은 시아누크를 수반으로 하는 4개 정파의 연립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낸 1988년 7월 1일을 되새겨보면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겉으로는 다른 나라에 대한 내정간섭에 반대한다는 평화공존 5원칙을 내세우면서도 유사시 필요할 때는 앞뒤 가리지 않고 내정간섭의 속내를 보여주는 중국의 감추어진 DNA를 우리는 미리미리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현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 ▷호서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