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옥살이'에 50여년 빨갱이 누명쓴 北납치 어부들...대검, 직권재심 청구

2023-05-16 14:17

1968년 조기잡이 중 납북됐다가 반공법과 수산업법 위반 혐의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납북어부 4명이 사건 발생 49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 전주지법 형사1부는 2017년 10월 20일 반공법 등의 혐의로 기소돼 각 8개월간 징역살이를 한 정삼근(왼쪽 세 번째)씨와 김기태(왼쪽 두 번째)씨 등 영창호 선원 4명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정씨 등 선원과 선원 가족들이 재심이 끝난 뒤 기뻐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검찰이 50여년 전 어로활동을 하던 중 북한에 납치됐다가 귀환한 후 우리나라에서 반공법위반죄로 유죄가 확정된 어부 100명에 대해 직권재심 청구 절차에 착수한다. 납북 후 귀환과 관련해 형사처벌된 피고인들에 대해 검찰에서 직권으로 대규모 인원을 재심 청구하는 첫 사례다.
 
대검찰청은 16일 1968년 동해상에서 어로작업 중 납북됐다가 귀환한 후 반공법위반죄 등으로 유죄판결을 확정받은 납북귀환 어부 100명에 대해 직권재심 청구절차에 착수하라고 전국 5개 관할 검찰청(춘천지검, 강릉지청, 속초지청, 대구지검, 영덕지청)에 지시했다.
 
납북어부는 우리 해상에서 어로 활동을 하던 선원들이 북한 경비정에 납치돼 북한에 머물다 귀환한 이들이다. 납북어부 사건은 1953년 7월 27일 군사정전협정 체결 후 다수 발생했다. 협정 체결 시점부터 1987년까지 납북된 어선은 459척, 선원은 3648명에 이른다.
 
특히 해군 56함 피격침몰 사건(1967년), 김신조 무장공비 사건(1968년), 푸에블로호 납치사건(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1968년) 등으로 남북 긴장이 최고조에 이른 1967년 47척‧352명, 1968년 90척‧766명이 납북되어 피해가 가장 심각했다.
 
당시 정부는 북한의 선박 납북을 비인도적 도발행위로 간주하고, 장기간 억류당한 귀환어부에 대해서는 관용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북한의 무장공비 침투 등 대남공작이 증가하고, 납북어부들로부터 입수된 정보(주요 시설 위치 등)가 대남공작에 활용됐다고 판단하면서 정부는 1968년 11월 조업하다 납북된 선원은 사실상 간접적인 간첩이라고 규정하기 시작했다.
 
납북어부들은 귀환 즉시 수사기관에 구금된 상태로 조사받은 후 수산업법 위반, 반공법 위반(탈출) 등으로 기소돼 재판을 받았다. 일부 납북어부는 반공법 위반(찬양고무 등), 국가보안법 위반(금품수수) 혐의까지 적용됐다.
 
귀환한 150명 가운데 1명은 1심 재판 중 사망하면서 공소기각됐다. 149명 중 17명은 징역 1년 실형을, 나머지 132명은 집행유예(대체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를 선고받았다.
 
이번 직권재심 청구 대상자 100명은 1969년 5월 28일 강원도 고성군 거진항으로 일괄 귀환한 기성호 등 선박 23척의 선장과 선원 150명 중 현재까지 재심이 청구되지 않은 어부들이다.
 
이들은 납북과 귀환, 형사절차 과정에서 생활고 등 극심한 경제적‧정신적 피해를 입었고 간첩‧빨갱이 등의 낙인이 찍혀 취업하지 못하는 등 정상적 사회생활을 영위하지 못했다는 것이 검찰 설명이다.
 
검찰 관계자는 “검사가 직권으로 재심절차를 수행함에 따라 피고인 또는 유가족이 스스로 관련 자료를 확보하고 소송비용을 부담하는 어려움을 덜 수 있다”며 “신속한 명예회복과 권리구제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