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춘 칼럼] 각자도생의 세계경제 …초심으로 돌아가자
2023-05-02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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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우외환 한국경제’라는 표제의 지난 칼럼에서 필자는 세계 경제 환경이 급속히 악화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중국의 성장률이 떨어지고 미·중 간 패권경쟁으로 첨단분야의 디커플링이 심화되고 있음을 우려하였다. 우리나라의 대중 무역수지는 2013년 628억 달러 흑자였으나 2022년에는 12억 달러로 축소되었고 금년(1-3월)에는 벌써 170억 달러 가까이 적자로 돌아섰다. IMF 경제위기 이후 지속적인 흑자기조를 유지해 온 무역수지는 2022년에 479억 달러 적자를 기록하였고 금년(1-3월)에도 이미 224억 달러의 적자이다. 세계적인 금리인상과 이에 따른 경기침체가 중요한 요인이지만 경기가 회복된다고 하더라도 다시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갈 것이라 장담할 수 없다. 세계 경제 환경이 이전과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미 글로벌 리더, 국제공조의 주체로서의 역할을 상실하였다. 미국은 오로지 중국을 압박하여 자국의 글로벌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정책역량을 쏟고 있을 뿐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G20을 통해 세계 경제의 회복을 주도하던 지도자로서 미국의 모습은 사라졌다. 미국은 오히려 자국의 이익을 중시하고 주변국에게 그 부담과 희생을 요구하는 보통국가가 되어버렸다. 주요 산업분야에서 자국의 산업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미국은 구체적인 조치를 취해 왔다. 2022년 8월에는 ‘반도체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이 발효되었다. 미국 내에 반도체 제조시설을 구축하면 세액공제 혜택을 주고 반도체 생산과 연구개발, 소재 분야에서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한다. 같은 시기에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이 발효되어 북미에서 최종적으로 조립된 전기차에 대해서만 보조금을 지급하고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에서 생산된 배터리 핵심 광물 및 구성품 비율을 높게 설정하고 이를 충족하지 못하는 전기차를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하는 조치가 시행되고 있다. 이러한 기조는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모두 지지하며 내년 대선 이후에도 그 기조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전에 쓴 칼럼에서 이웃 일본의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을 소개한 적이 있다. 이 법은 (1)특허출원의 비공개 제도 도입 (2)공급망 강화 (3)첨단기술의 민관협력 (4)중요 국가인프라의 안전성 확보를 골자로 한다. 반도체 등 ‘특정중요물자’로 지정된 품목은 국내에서의 개발과 생산을 재정적으로 지원한다. 정부는 특정중요물자의 개발 및 생산계획을 심사하여 지원대상기업을 선정한다. 정부가 민간과 협력하여 첨단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지원하는 기금을 설치한다. 기술개발에도 정부 보조금이 투입되며 나아가 정부가 보유한 기술정보까지 민간기업에게 제공한다. 통신, 전력, 항공, 철도 등 국가 중요시설에 소요되는 설비나 기기를 도입할 시 국가의 심사를 받도록 한다. 일본은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를 통해 미·일 공급망 협력을 강화하려 하고 있다. 이처럼 일본도 자국의 제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공급망의 안정성을 보강하기 위해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산업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최근에는 미국의 대중 반도체 제재에 동참하는 등 미국의 대중 제재에도 협조적으로 나서고 있다.
중국은 자립자강을 외치고 있으나 불확실성이 높다. 미국의 반도체 제조장비에 대한 대중 수출 규제로 인하여 중국의 반도체 업체들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수출통제가 도입된 2022년 10월 이전(1-9월)과 그 이후(10-‘23.2월) 중국의 반도체 장비 수입 추이를 보면 대부분 처리공정에서 수입이 감소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열처리, 증착(PVD), 건식식각, 기타 식각 등의 공정에 필요한 장비의 수입은 20∼40%나 감소하였다. 외자기업이 많이 소재한 지역보다 중국기업이 많은 지역에서 수입감소가 두드러지고 있어서 중국기업이 타격을 더 많이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진핑 3기의 출범과 더불어 중국은 최고 국가기관에서 과학기술분야를 직접 총괄하도록 조직개편을 하는 등 공급망 안정과 자립화를 중시하고 있으나 기술혁신의 한계를 얼마나 극복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여기에 인구고령화, 소득격차 확대, 부동산 버블, 기업부채 등 중장기적 리스크도 산적해 있다. 한국으로서는 중국경제의 중장기 리스크에 어떻게 대응할지가 중요한 과제이다.
개개인의 삶이 ‘각자도생’의 길로 흘러가고 있듯이 국가들의 정책도 ‘각자도생’의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누군가 나서서 전체를 규율하고 방향을 잡아주고 협력을 유도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 글로벌 사회 전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각자 자기의 살길을 찾아 우왕좌왕하는 일이 많아질 수 있다. 이런 때일수록 위기는 더 빠르고 더 강하게 찾아온다. 어디에서 어떤 형태로 금융위기 또는 안보위기가 터질지 모른다. 그리고 위기가 터지면 그 위기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빠르게 주변으로 확산될 것이다.
예전에는 다자체제에서 힘이 세고 선의를 가진 누군가가 질서를 잡아주면 우리는 그 질서 속에서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해 분투하면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에게 모든 나라가 각각의 독자적인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 시대가 되었다. 양자관계에 힘을 써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리 경제의 체질 개선이 시급하다. 비정상의 정상화이다. 무엇이 비정상이고 무엇이 정상인지는 조금만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가계, 기업, 정부 모두 ‘자신의 분수에 맞게’ 소비, 투자, 그리고 재정 활동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각자도생의 시대일수록, 위기와 불확실성이 더 가까이 있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각자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그 위치에 맞게, 그 분수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정성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學) 경제학연구과 경제학 박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