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 제보했더니 가해자로 둔갑…공익제보 막는 '사실적시 명예훼손'

2023-04-10 15:40

[사진 = '배드 파더스' 제공]


# 한 스타트업에서 일하던 A씨는 본인 SNS에 회사 대표가 회식 자리에서 술을 강요하거나 직원들을 유흥업소에 데려가는 등 갑질을 일삼았다는 글을 올렸다. 글에는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했는데도 소주 3병을 강요했다' '룸살롱에 데려가 여직원도 여자를 초이스하도록 했다'는 주장 등이 담겼다. A씨는 글을 게시한 후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A씨는 줄곧 재판에서 "'갑질 개선'이라는 공익을 위해 객관적 사실을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익성이 인정된다며 대법원은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지만 상고심까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정신적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학교폭력, 갑질, '미투(Me Too)' 등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에서 인터넷 등을 통한 피해자의 호소나 공익 제보가 활발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이 입은 피해를 '폭로'했다가 오히려 역으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를 당하는 일도 잦아지면서 '사실 적시 명예훼손'을 비범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공익성' 위법성 조각사유 두고 있지만···재판부마다 판단 엇갈려
10일 아주경제 취재에 따르면 현행 형법 307조는 공연히 사실을 적시해 사람 명예를 훼손한 자를 처벌한다고 규정해 사실을 말한 자도 명예를 훼손했다면 처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다만 같은 법 310조는 '공익성'을 위법성 조각사유로 두고 있다. 

하지만 공익성에 대한 판단 기준이 재판부마다 달라 같은 사안을 두고도 다른 결과가 나올 때가 많다. 양육비 미지급자 신상을 공개했다가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배드파더스(Bad Fathers)' 사이트 운영자 구본창씨가 대표적인 예다.

구씨는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1심에서 배심원 7명 전원 무죄 평결을 받았고 재판부 역시 공익성을 인정해 무죄를 선고했다. 반면 항소심 법원은 얼굴 사진과 세부적인 직장명까지 포함해 신상정보를 올리는 것은 개인 인격권 침해라고 보고 구씨에게 벌금 100만원 선고유예 판결했다. 구씨 재판은 상고심까지 올라가 현재 대법원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해 퇴사 후 회사 대표의 갑질을 폭로하는 글을 올렸다가 하급심에서 벌금형을 선고 받은 직원이 대법원에서 무죄로 뒤집힌 사례도 있다. 당시 대법원은 "피고인이 글을 게시한 주요 목적이나 동기가 기업 내 '직장 갑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기 위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판시했다.  
 
해외는 대부분 '비범죄화'···"한국도 민사적 해결 방향 도모해야"
반면 대다수 국가가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는 '진실한 사실'을 입증하면 처벌하지 않는다. 미국도 대부분 명예훼손 행위를 민사상 손해배상으로 해결하고 있다. 다만 미국은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에 따라 가해자 행위가 악의적이고 반사회적일 때 피해자가 실제로 받은 손해보다 훨씬 더 큰 액수를 배상하도록 하고 있다.

유엔도 우리나라에 여러 차례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 폐지를 권고했다. 2011년에는 유엔 표현의자유 특별보고관이, 2015년에는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가 한국 정부에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 폐지를 권고했지만 우리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률 전문가들은 우리나라도 피해자의 호소를 막는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를 비범죄화하거나 구성 요건 범위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재판부마다 공익성에 대한 판단이 다르고 처벌 규정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피해자들이 피해 호소나 공익 제보를 하는 데 있어 압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박상수 변호사는 "외국처럼 사실 적시 명예훼손을 비범죄화하되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해 민사적으로 해결을 도모하는 방향이 바람직하다"며 "또는 현행 형법 규정에 '오로지 타인을 비방할 목적으로' 같은 목적범으로서 구성 요건을 추가해 사실 적시 명예훼손의 구성 요건 범위를 축소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