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조원 채권 휴지조각 전락…"채권시장으로 불 번졌다"

2023-03-20 17:08
CS의 AT1 상각으로 채권시장 22조원 상실
채권자 권리가 주주보다 우선시되는 관례 파괴
채권시장 전반 신뢰 저하, 대규모 자금 이탈 우려

크레디트스위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160억 스위스프랑(약 22조7000억원)이 넘는 채권이 한순간에 휴지조각으로 전락하자, 뱅크런 위기가 채권 시장으로 번지고 있다. 스위스 최대은행 UBS의 크레디트스위스(CS) 인수로 한숨 돌리던 시장은 CS의 신종자본증권(AT1·Additional Tier 1, 코코본드)의 가치가 제로가 됐다는 소식에 경악했다. 아시아 시장에서 HSBC 등 주가가 폭락하는 등 시장 불신이 금융 시장 곳곳으로 전이되고 있다. 
 
스위스 금융감독청(FINMA)은 19일(현지시간) UBS의 30억 스위스프랑(약 32억 달러)에 달하는 CS 인수를 승인하면서 “약 160억 스위스프랑에 달하는 CS의 AT1 채권은 완전히 상각된다”고 발표했다. 이는 CS의 AT1 채권의 가치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의미다.

AT1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은행이 파산 등 위기를 겪을 때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도입된 채권의 일종으로 후순위채권 또는 코코본드라고도 통한다. 은행의 자본비율이 일정 수준 아래로 떨어지면 상각되거나 보통주로 전환돼 은행의 자본을 방어하도록 설계됐다. 납세자가 아닌 투자자가 위기에 따른 손실을 부담하도록 한 것이다.
 
문제는 이번 CS의 AT1 상각이 매우 이례적이라는 점이다. 지난 2017년 스페인 포플라르은행의 13억5000만 유로(약 1조8900억원)에 달하는 상각이 최대 규모로, 이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손실 사례는 없었다.
 
특히 통상 채권 투자자의 권리는 주주의 권리보다 우선되나, 이번 인수 과정에서는 이런 틀이 지켜지지 않았다. CS주주들은 CS 주식 22.48개당 UBS 주식 1주를 받은 반면, AT1 투자자들은 한 푼도 건지기 어렵게 된 것이다. 아퀼라 애셋의 패트릭 카우프만 채권 매니저는 "말이 되지 않는다. 주주들이 아무것도 받지 않아야 한다"며 "AT1이 주식보다 선행돼야 한다"고 블룸버그에 말했다.
 
AT1 휴지조각 사태는 글로벌 채권 시장 전반에 폭풍을 일으킬 수 있다. 세계 AT1 시장 규모는 2750억 달러(약 360조원)에 달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금융권 관계자를 인용해 "이번 결정으로 채권 보유자들이 CS주주보다 큰 손실을 입었다. 유럽 채권 시장 전반에 악몽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짚었다.
 
이날 아시아 채권 시장에서 HSBC 은행의 20억 달러 수준의 AT1 채권은 1달러에서 85센트로 10센트 넘게 하락했다. 이는 이달 초 거래가 시작된 이래 최대 규모의 낙폭이다. 홍콩 증시에서 HSBC 홀딩스와 스탠다드차타드 은행의 주가가 각각 6.6%, 5.6% 급락하며, MSCI 아시아 태평양 지수는 1.6% 하락했다. 

채권 시장이 얼어붙으며 유가도 동반 하락했다. 미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근월물)은 이날 배럴당 65달러 아래로 떨어지며, 2021년 12월 이후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투자자들이 피난처로 몰리면서 금값은 작년 3월 이후 처음으로 온스당 2000달러를 넘겼다.
 
각국 중앙은행은 시장 불안을 차단하기 위해 유동성 공급에 나섰다. 이날 스위스 중앙은행과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캐나다은행, 잉글랜드은행(BOE), 일본은행(BOJ), 유럽중앙은행(ECB) 등은 공동 성명을 내고 달러 유동성 스와프와 관련해 7일 만기 운용 빈도를 주 단위에서 일 단위로 늘리기로 했다고 밝혔다.

스와프 라인은 통화를 교환하기 위한 중앙은행 간 계약이다. 예컨대 ECB는 스와프 라인을 통해 연준과 달러-유로를 교환하고, ECB는 해당 달러를 유로를 사용하는 20개국의 상업 은행에 뿌릴 수 있다. 지난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발생했던 달러 부족난을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의지다.